철학 스토리텔링

파자(破字) 개념론 - 주관적 정서의 범주화

체거봐라 2009. 5. 16. 11:39

예술이 주관적 정서를 형상화 하는 것이란 걸 이제 이해할 만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정서(情緖)란 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정서의 '緖'가 '실타래에 감겨 있는 실의 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글자라는 것을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정서'는 마음의 실마리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설명하면 더 어려워집니다. 그냥 마음 또는 감정이란 게 워낙 파악이 잘 안 되는 모호한 것이라 실이 마구 엉켜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느낌, 정서, 감정 이런 것들이 엄청 중요한데 요즘 교육은 정서를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문명사적으로는 근대 이후 과학적 사고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합리적 이성이 중요시 되어온 결과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입시제도가 이런 편향을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시에서 감성교육 과목은 별로 출제가 안 되니 학교에서 감성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게 되는 것이라고 보면 맞을 겁니다.

 

요즘은 학생들이 입시 준비를 위해 어릴 때부터 논술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교육이 바람직한지 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랍시대 교육자들은 변증법을 30세 이전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대의 교육관이 구시대적이라고 무시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청소년들이 온화한 심성을 기르기 전에 변론술을 먼저 배우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적 명철함이 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논리가 변론술로 취급되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게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기기보다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이 이런 논리 만능 풍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요.

 

저는 감성교육을 위해 예술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개념을 활용하는 과학과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형상(이미지)을 활용하는 예술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예술은 잘 조화를 이루어야겠지만 지금은 죽어버린 예술 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과학과 구분되는 예술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예술 활동의 목적은 정서의 표현 교감입니다. 그러니 정서는 예술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정서가 무엇인지 공부하는 것이 바른 예술 교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서란 게 무엇일까요. 한자 '정서(情緖)'를 분해해 봐도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情緖가 '실뭉치처럼 엉켜있는 마음'이란 뜻이니 말입니다.

 

정서에 대해 가장 깊게 다룬 학문은 아무래도 유교의 성리학이 아닌가 합니다. 성리학은 송나라 때에 일어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맹의 학문이 제왕학으로 출발하여 다양한 이론으로 발전하가다 도학(道學)으로까지 발전한 것이 성리학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통치술로 출발한 유학이 수신학(修身學)으로 발전한 것이 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신학은 심리학 또는 종교(宗敎)의 성격을 가지는 학문으로 몽골에 의한 세계화 직전까지 동서양 모두 이런 사유방식이 크게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내면 지향이 전세계적 트렌드라고 보는 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성리학의 사단칠정론에서는 정서를 일곱 가지로 나눕니다. 喜(기쁠 희), 怒(성낼 노), 哀(슬플 애), 樂(즐길 락), 愛(사랑할 애), 惡(미워할 오), 慾(욕심 욕)이 칠정이고 사단은 惻隱之心(측은지심), 心(수오지심), 辭讓之心(사양지심), 是非之心(시비지심)을 말합니다. 사단(四端)은 각각 윤리적 덕목인 仁(어질 인), 義(옳을 의), 禮(예절 예), 智(지혜 지)를 이루는데 처음 실마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仁(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하듯이 모든 윤리적 덕목은 사단에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좀 복잡합니다. 조선 후기에 벌어진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이 유명한데 이를 이기논쟁이라고 합니다. 대충 사단을 理(이치 리)라고 보고 칠정을 氣(기운 기)로 단순화해 봅시다. 사단과 칠정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의견이 달라 논쟁을 벌인 게 이기논쟁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황은 '이'와 '기'를 구분했고 기대승의 의견에 동조한 이이는 '이'와 '기'가 하나라고 봤습니다. 이황의 생각을 이기이원론 또는 주리론이라고 하고 이이의 생각을 이기일원론 또는 주기론이라고 합니다. 너무 복잡한 이론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니 더 깊이 얘기하지는 말도록 합시다.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황은 도덕관념(사단, 理)과 감정(칠정, 氣)을 분리했고 이이는 이 둘을 분리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