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폐위 사건과 소수서원의 내력
수 년전에 영주를 다녀올 기회가 있어 소수서원과 부석사를 둘러 본 적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영상으로 기록해 두기는 했지만 편집할 시간을 내지 못 해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수 일 전에 읽은 청소년용 역사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꺼내 볼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여 이리 저리 자료를 뒤져보면서 산만하게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기억들을 꿰어나갔습니다. 영주는 집사람 고등학교 은사님 김영국 선생님의 초대로 수년 전에 다녀왔습니다. 보름 전에는 대학 동기가 자기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동창들을 초대했는데 그가 살고 있는 동네가 풍기입니다. 수 일 전에 읽은 [퇴계 달중이를 만나다]의 배경은 안동입니다. 필자는 본관이 진성(안동 부근 퇴계 선생의 본관)임에도 불구하고 안동 도산서원을 한 번도 다녀온 적이 없습니다. 늘 제 뿌리에 대해 마음을 쓰면서도 실행에 옮기지를 못해 좀 부끄러워하고 있던 차라 큰 놈에게 추천할 만한 [퇴계 달중이를 만나다]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나부터 단박에 읽었습니다. 책장을 덮고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싶기도 하고 세상이 참 좁다 싶기도 했습니다. 살면서 점점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들추어본 책 나부랑이도 늘어나니 기억력만 쇠하지 않는다면 이리 저리 겪은 일들이 건너 건너 다 엮이는 재미진 경험들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하니 괜히 내가 좀 대견해지기도 합니다.
영주 소수서원에 들러 주변에 있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금성단)를 둘러 볼 때에는 그냥 수양의 단종 폐위에 대해 큰놈에게 한 마디 물어본 게 전부인 거 같습니다. 아들놈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큰애가 [퇴계 달중이를 만나다]를 읽으면서 조상 중에 꽤 학덕이 높았던 분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자기를 '인정(recognition)'하는 심리가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층 구체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퇴계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조정에 강력 천거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의 영주 여행이 새삼 좀 실감이 나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좀 나누고 영주 여행을 담아온 영상물을 같이 살펴봐야겠습니다.
영주에 갈 때는 물론 죽령을 넘었습니다.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은 소백산 죽령을 넘어 풍기를 지나 부석으로 들어가다가 국망봉 밑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동네입니다. 영주의 들판 어디에서도 소백산이 바라보이고 소백산을 이루는 한 봉우리인 국망봉에서 흘러내인 죽계천은 순흥을 돌아 영주로 흐릅니다. 이 죽계가 안축의 [죽계별곡] 무대입니다. 안축은 순흥 안씨인데 이 집안이 금성대군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큰 화를 당합니다.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죽계 천변에 위리안치(가택연금) 되는 바람에 순흥에 터잡고 있는 순흥 안씨 집안은 단종 복위 사건에 휘말려들게 되고 결국 멸문지화를 당합니다. 소수서원을 싸고 도는 듯이 흐르는 죽계는 단종복위 운동 때 세조의 칼부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하류에 있는 지명 ‘피끝마을’은 그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선초 도호부(큰 도시) 중 규모가 가장 컸다고 전해지는 순흥은 그때 쇄락하여 지금은 한미한 시골마을이 되어 버렸지요.
안축의 조상 중에 안향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안향은 고려말 중국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학자입니다. 중국은 송대에 들어와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고 새로운 학풍 성리학은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주자학(성리학)은 이전 유학과는 다른 패러다임(논리 체계)을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송대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난 때가 대략 12세기 무렵이고 안향이 이를 고려에 도입한 무렵이 13세기 무렵입니다. 당시 고려는 불교의 부패로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새로 일어난 유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순흥 안씨 집안에서 안향은 조선 성리학의 시조로 떠받들어지는 것입니다. 금성대군이 순흥에 유배되어 갖힌 게 1456년이니 성리학이 들어오고 200년 가까이 흐른 뒤입니다. 단종 복위운동은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이니 안향을 성인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약 100년 뒤 중종 때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 지내기 위해 사당을 지어 백운동서원이라 이름 지었다가 10년 뒤쯤인 1550년에 풍기 군수로 온 퇴계 선생이 추천하여 사액서원이 되었고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고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