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아웃사이더로 산 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
조정 안에서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조정 밖에서는 금성대군을 옹립하려는 순흥 안씨 세력과 단종 복위를 꾀하는 김시습 등의 세력들, 유교적 질서관을 바로 세우려는 이들 세력들은 세조(수양)를 세운 한명회 신숙주 등의 쿠데타 세력을 압박해 들어가며 건곤일척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쿠데타 세력에 맞선 인물 중 매월당 김시습은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세조의 정치적 폭력 속에서 절의로 항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고, 방랑과 은둔으로 평생을 마친 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창작한 문학가였다.
김시습은 어릴 때 신동으로 알려져 세종 임금이 불러 그의 재주를 확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승정원의 한 관원이 “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아이의 학문이 백학이 창공 드높이 나는 것 같구나)”라고 운을 떼니 다섯 살 김시습은 “聖主之德黃龍翻碧海之中(임금님의 성덕은 황룡이 창해를 덮은 것 같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아이의 공부를 두고 춤춘다(舞)고 했으니 주상의 통치에 어떤 글자를 쓰는 것이 마땅할까. 김시습이 임기응변으로 선택한 翻은 ‘날다’는 뜻과 ‘뒤집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는 글자이니 임금의 통치 행위를 묘사하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섯 살의 아이가 구사할 수 있는 시구절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 나이에 이미 김시습은 경전(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신동이었던 건 확실한 모양이다. 다섯 살 무렵이면 '사자소학' 정도 읽는 것도 엄청 총명하단 소릴 들을 만하다.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양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혈육까지 처단하는 과감성을 보인 것에 대해 당대 지식인 사회 주류들은 이반했음을 김시습의 일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고려 유신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주자학의 세계관이 조선 지식인 사회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지식인 사회의 주류들이 이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 정치를 과감하게 포기하기도 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구사했던 친위 세력들을 권력 투쟁에만 골몰하는 간신들로 풍자하면서 그들의 부패가 백성들을 비참한 지경에 빠트렸다고 비판하면서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의 일탈적 행위에 대한 풍문은 그 자체로 풍자 문학이었으며 남긴 작품 대부분이 시대상을 직간접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천재가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민간을 떠돌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우리 문학에 큰 복이라 할 것이다.
어느 누가 / 먹고 놀면서 /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란 다더냐
손톱 하나 / 까딱하지 않는 것들이 / 세상 물정을 통 모르네.
내 성동에 / 빌린 밭 몇 뙈기 / 국록 대신으로 힘써지었거니
참새랑 들쥐가 / 반타작을 해가도 / 그런대로 얼굴을 펴고 살았네.
김시습과 대비되는 인물이 서거정이다. 서거정은 지금의 대통령자문위원회에 해당하는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을 20년 넘게 지낸 인물로 당대 문장의 최고봉으로 인정받은 자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 법한 [동국여지승람]이나 [동문선]을 그가 편찬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김시습의 이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단종폐위 사건으로 과거 준비를 그만 두고 산천을 떠돌아 다녔으니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알만한 저술로는 [금오신화] 정도가 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이생규장전>이니 <만복사저포기>니 하면서 외우던 작품이 바로 [금오신화]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활동이 지금에 와서는 ‘소설’ 장르를 개척한 공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대는 영 딴판이었다. ‘소설’이 현대에는 가장 인기 있는 장르로 자리잡았지만 영정시대까지도 가담항설(街談巷說 뒷골목 이야기)로 천하게 여긴, 글 축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 김시습은 신동으로 태어났지만 시대와 불화해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세상사를 삐딱하게 트집 잡는 건달정도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김시습과 서거정은 정반대로 살았다. 서거정은 살아 있을 때 온갖 영화를 누렸지만 김시습은 죽고 나서 후대에 길이 남을 명성을 얻었다. 두 사람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후대 유학자들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조선 유학자들의 패러다임은 세조의 거사를 천하의 패륜으로 보는 적통 계승의 논리에 지나지 않다. 조선 초 왕권이 아직 굳건하지 않을 때 다소 인정을 거스르는 통치 행위가 유교적 윤리관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아무튼 수양의 왕위 찬탈은 희대의 패륜이요 그의 거사를 도운 자들은 개인의 영화를 위해 패악도 서슴지 않은 천하의 악한으로 보는 게 상식이 되어 버렸다.
이문구의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은 이런 상식적 역사관이 투영된 대표적인 김시습 전기로 읽힌다. 김시습은 세종이 직접 불러 총명함을 확인한 오세 신동이었던 자로 출세 길이 훤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수양의 거사 소식을 듣고 책을 불태우며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행위는 대단한 의기로 설화가 되었고 평생 산천을 떠돌며 세태를 풍자했던 반체제 지식인으로 그리고 있다. 김형경의 단편소설 <단종은 키가 작다>는 이런 상식이 얼마나 뿌리깊게 현대가지 이어져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월의 지역축제 단종제가 어린 임금 단종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는 어울리지 않게 통속적인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 참고 자료 *
역사탐구-과거와의 대화(EBS) ‘지조와 광기의 천재-매월당 김시습’편.
이문구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