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팩션 한국사

이순신 장군은 자살했다

체거봐라 2010. 2. 8. 10:09

임란 중의 당쟁과 이순신의 죽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이 왜 탄핵을 받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부끄러운 역사이니 가르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당파 싸움이 워낙 복잡하여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도 한몫을 합니다. 아무튼 임란이 터지기 전까지는 중종반정의 공신들 간의 다툼과 외척의 권력 투쟁이 복잡하게 얽혀 당파는 사분오열되어 나갔지만 전쟁이 발발하고서는 일종의 연합 동거 체제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국왕의 힘은 약할 대로 약해져서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조 이후 강화된 왕권은 연산조에 들어와 꺾여버렸고 중종반정은 왕권의 후퇴와 귀족세력의 해게모니 장악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전쟁을 맞았으니 일본에게 파죽지세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투에서 공을 세워 신망이 높아진 장수는 권력 질서를 흐트러뜨릴 수 있는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조선 조정은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는 시이저를 두려워 하는 로마 원로원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서인들은 남인인 류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의 공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류성룡이 설계하고 밀어붙이고 있는 전시체제의 파격적 정책도 달갑지 않았습니다. 양반도 전쟁에 동원하게 한 속오군 제도와 공에 따라 노비를 양민으로 해방시켜주는 면천법은 신분질서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비난했지요. 그러니 전쟁이 수습될 국면이 되어 어김없이 탄핵론이 제기되었고 결국 류성룡의 실각과 이순신의 자살로 마감되고 맙니다.

 

을사사화를 통해 훈구파 세력은 기울어가는 권력을 수습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망해 가는 집안처럼 자중지란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외척간의 권력 다툼은 훈구파의 제 살 뜯어먹기였던 것이지요. 성장하고 있는 사림 세력을 감당해낼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사림 세력 또한 분열의 화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미 훈구파 외척 세력은 상대가 아니었으니 사림 세력은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된 것이지요. 기축사화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사화(士禍)라고 하니 훈구파에 의해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기축사화는 자기들끼리의 권력 다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외침을 받았으니 나라의 형편이 어떻겠습니까. 이순신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 당쟁의 결과라는 의견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정리하자면 명장 이순신이 어이없이 죽게 된 것은 리더쉽 부재(임금의 오판)와 분열(정파의 분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