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북벌정책, 지조인가 권력욕인가
송시열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중화주의자들의 명분론에 맞지 않자 급기야 반정을 불사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임란 때 의병을 지휘하여 민심을 크게 얻고 있어 강한 개혁 정책을 펼칠 수 있었는데 대동법을 위시한 개혁정책은 필연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득권 세력에게는 사림의 이념(주자주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물질적 기반(토지 소유권)까지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고 이는 사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논리요 명분이 됩니다. 왜란을 당해 국운이 백척간두에 놓였을 때 어버이 나라(명나라)가 구해 주어 망국을 면했으니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명분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이념적 지표인 주희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렇게 반정은 일어나고 반정 이후의 조선은 노론 일색이 되어 버립니다. 그 정파의 중심에는 d우암 송시열이 있었지요. 송시열의 생각을 살펴보면 인조반정 이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정권을 차지했던 서인 노론의 철학과 정책이 어떻게 국운을 쇄하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기사를 보면 북벌론의 명분을 제시한 송시열의 세계관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肅宗實錄』9-2-12)."
인조가 자신의 아들(소현세자)까지 죽이면서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나라의 기강이 뭐였을까요. 거칠게 말하면 바로 소중화주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청 황조에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고 그가 예상보다 빨리 귀국하자 인조는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결국 삼촌 뻘 되는 광해군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죽였듯이 친아들인 소현세자를 제주도로 보내 죽입니다. 인종반정의 명분 중 하나였던 광해군의 폐륜 못지 않은 폐륜이 아닙니까. 인조의 이런 무리한 집권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반정 주도 세력은 분열하여 내전(이괄의 난)까지 치르게 되지요. 그러니 백성들은 인조의 집권을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사리사욕을 채우려다 나라 들어먹은 놈들이라는 생각이 파다했지요. 다음 사설시조는 이런 백성들의 반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위에 치다라 앉아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리닫다가 두험 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랜 나이기에 망정이지 어헐질 번 하괘라(『眞本 靑丘永言』)
인조반정 이후 노론 집권세력의 중심 역할을 했던 송시열의 사상과 그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송시열의 사상을 좀더 깊이 알기 위해 친구였던 윤휴와 벌였던 사상논쟁을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윤휴에 대한 그의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노론과 소론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송시열과 윤휴는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이지만 나중에 정파 대립으로 인해 원수지간이 됩니다. 둘이 서로 갈라서게 된 계기는 윤휴의 [중용] 주해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합니다. 윤휴의 중용 주석에 대해 송시열은 송대 주희의 해석과 다른 점을 지적하였는데 윤휴는 주희는 되고 자기는 왜 안 되냐고 맞받았습니다. 나중에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하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요. 효종이 죽고난 뒤의 예송논쟁에서는 송시열과 허목이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허목은 효종이 둘째이긴 하지만 왕이 되었으니 3년간 상복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하였고 송시열은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다름 없이 맏이가 아니면 1년만 하면 된다고 대립했습니다. 논쟁은 15년간 지속되었지요.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무슨 논쟁을 그리 오래 하고 난리냐 싶지만 그 이면에는 굽힐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노론은 반가와 왕가의 예법이 다르지 않다(天下同體)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것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정조 때 개혁 세력이 사서보다 오경을 중시하는 경향은 바로 이런 정치적 대립과 연관지어 해석해야 이해가 됩니다. 왕과 사대부는 모두 공맹의 제자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노론의 입장에서는 王士不同體(신하와 왕은 다르다)를 주장하는 남인의 주장이 이단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송시열 사상의 대강을 밝히려고 할 때에, 예송논쟁(효종 서거 이후 계모 자의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벌어진 논쟁)과 사문난적 논쟁과 더불어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그의 ‘북벌론’입니다. 북벌론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찬반 논쟁이 붙지는 않았지만 호란 이후의 조선 정치 현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느니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논의라고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은혜를 입은 어버이 나라 명을 망하게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을 유린하여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해 보복을 해야 한다는 명분은 당대 조선 사회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대의였습니다. 그러니 정치 세력을 형성하려는 집단은 어떤 이를 불문하고 북벌 명분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지요. 청나라 조정과 친밀했을 뿐 아니라 실리외교 노선을 견지한 소현세자가 죽임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었으니 효종뿐 아니라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추진한 세력들은 북벌에 대해 추호도 회의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효종이 대군일 때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북벌론자인 건 너무 당연합니다.
송시열이 예송 논쟁(효종에 대한 장자 서자 대우 논쟁) 때 효종을 깎아내리는 듯한 논조(서자로 대우해야)로 일관하여 나중에 효종의 후손인 숙종 때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의심한다는 혐의를 얻기까지 했지만 그의 주장은 상당히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주자학을 절대선으로 숭앙했던 그는 나중에 친구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 만큼 주희의 세계관에 충실했는데 남송대의 주희가 북방 세력의 위협에 맞서 한족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완고한 자기완결성을 추구했듯이 송시열은 조선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타협적 노선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예송 논쟁에서도 절대왕권을 부정하고 군신간의 수평적 공존을 이념으로 하는 주자학의 기본 정신을 견지했던 것입니다. 그가 남인과의 정쟁에서 일관되게 배청 명분을 강조하고 남인을 몰아내고 난 뒤에는 소론의 타협적 노선을 공격하여 결국 서인 노론 정권을 공고히 한 과정에서 그의 명분론은 분명 정치적 힘으로 쓸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비타협 노선은 선비의 기개로 높이 평가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정조가 어떤 현실적 이유에서 그러했을 수도 있겠지만 송시열을 송자로 높이 받드는 책을 직접 쓴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비타협 명분론은 조선사회를 폐쇄적인 전근대 국가로 남게 하는 역사적 불운을 잉태케 했으니 그의 선비정신은 무엇을 위한 지조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그가 사약을 받을 때 살기 위해 추태를 부린 일도 있다는 일설은 그의 선비정신마저도 의심스럽게 만들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