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세계 명작(4)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세계 문학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십니까. 1866년에 발표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50년 전의 작품입니다. 세대로 치면 다섯 세대 전의 작품이 지금도 여전히 읽히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 아닙니까. 이렇게 고전으로 자리잡아 오랫동안 우리 마음을 휘어잡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이 작품이 여러 면에서 참가치를 갖고 있겠지만 저는 이 작품이 정의의 원칙에 대해 아직도 유효하며 가슴을 울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벌을 내릴 수 있는가? 선과 악의 판별 원칙은 무엇인가? 남을 아프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뭐가 고민인가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을 아프게 한 만큼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 되어야 할까요. 살인을 저지른 자는 죽여야 마땅한 것일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죄와 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알아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가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살펴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많이 닮았습니다. 작가는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수용소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그룹에 참여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 직전 감형받아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어졌던 것이지요. 그의 초기작 [가난한 사람들]은 그의 초기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당대 급진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를 뛰어난 작가로 추켜세운 건 유명한 비평이론가 벨린스키였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호전적인 사회주의자 벨린스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벨린스키가 던진 질문이 그의 사고를 지배했으리라고 보는데 벨렌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경제적인 빈곤이 범죄를 이끌 때, 죄를 범한 사람을 벌줄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비타협적인 급진 사회주의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형지에서 번민의 밤을 지세우며 내면의 변화를 겪습니다. 그의 사상적 변화는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번민과 회개로 그려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형지에서 벨린스키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갈등하며 불면의 밤을 보낸 것이지요. 수용소에서 풀려날 때 쯤에는 '그리스도가 진리 밖에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생각이 많이 변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이론가 벨린스키 못지 않게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단히 사색하고 궁리해야 했지요. 도덕적 원칙을 분명하게 세우고 그 원칙에 어긋나는 불의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주장이 지혜롭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걸 증명해 내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의 삶이 더 선량하며 원칙에 더 부합된다는 걸 입증해야 했습니다. 이런 고뇌가 [죄와 벌]로 탄생한 것입니다.
[죄와 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내면으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게 당연합니다. 작가의 삶을 살펴서 [죄와 벌]을 해석해 보면 작품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저지른 살인은 작가의 말처럼 온전치 못하긴 하지만 어떤 정의의 원칙에 의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고리대금업자 전당포 노파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마땅히 벌받아야 할 척결 대상이라는 겁니다. 토스토예프스키가 젊은 시절에 주로 읽은 책들이 대부분 초기 사회주의 사상을 내포한 것들임을 알면 [죄와 벌]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걸 인정할 것입니다. 생시몽, 프루동, 푸리에 등 초기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저작물을 주로 읽었으니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을 쓴 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죄와 벌]도 이런 독서 이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법정에서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낡은 법률을 파괴하고 새로운 정의의 원칙을 세우기 위한 피흘림이라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그의 언행으로 보아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 행위는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악한 짓으로 볼 수 없으며 정의의 실현을 위한 정당한 투쟁으로 보아야 합니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을 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는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저지른 살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며 소냐에게 털어놓는 그의 고백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자신이 저지른 짓을 고백하며 노파를 죽인 이유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초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판단할 수 있는 존재, 자유(自由)로운 존재가 되고자 했다는 겁니다. 진정 자유로운 존재,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왜 죄책감을 불러일으킬까요.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라는 말이 라스콜리니코프가 갖게 된 죄책감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근대 이후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이 어떤 비극을 초래하였는지 살펴 보면 인간의 자만심이 죄의 시작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에 걸쳐 대량 학살을 자행한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불의에 맞서 정의를 부르짖을 때, 정의를 세우기 위한 피흘림을 촉구할 때 우린 자만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만(自慢)은 곧 자존심, 자존감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추구하는 자존감이 신을 외면하는 짓, 즉 죄악일 수 있다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은 선악에 대한 분별력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에덴 동산의 설화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왜일까요. 갈등과 분쟁, 심판과 처단, 이런 모든 불행은 '주체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요. 모든 죄악의 근원은 성급한 심판이 아닐까요.
[죄와 벌] (1983)
[죄와 벌] (2002) 영국 BBC 드라마
영화 [오늘], [인 어 베러 월드], [밀양]은 [죄와 벌]의 또다른 변주들이네요.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