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감성지수) 높이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아름다울 수 있는가?

체거봐라 2012. 1. 22. 22:08

자식을 낳으면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속썩이는 자식에게 귀가 닳도록 하는 잔소리가 '너도 자식 낳아봐라' 아닙니까. 그런데 참 씁쓸합니다. 나 자신도 자식 낳기 전에는 부모 마음을 몰랐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러니 자식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참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을텐데 그걸 까막득히 잊고 자식이 애비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속을 끓이고 있으니 참 가소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도 자식 낳아 봐라'는 말 못 하겠습니다.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게 뭔지, 자식이 커서 어른이 되면 부모 자식 간에 어떤 정분이 남는지, 참 아름다운 부모 자식 사이를 누린 분으로 어떤 분들이 계셨는지, 이리 저리 알아보고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린 소설로 요즘 유명해진 작품이 [엄마를 부탁해]가 아닌가 합니다. 신경숙 씨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겁니다. 작가는 늙은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마음을 10여 년 전에 이미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두 작품 다 부모의 부재로 인해 비로소 부모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 줄기를 갖고 있습니다. 부재를 통한 존재의 확인을 주제로 한다니 삶의 본질, 존재의 의미를 말한 작품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좀 신파적 연민으로 읽힐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면 때문에 작가의 작품 세계가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외딴방]이 시대상황과 진지하게 소통한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데 반해 [풍금이 있던 자리]가 사소설로 평가절하된 비평계의 대체적인 평가 기준에 의한다면 [엄마를 부탁해]는 두 작품 그 사이 어디쯤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도 이 작품이 먹혀든다고 떠들썩할 때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연민과 죄의식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정서임을 웅변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복고 취향이다, 신파적이다, 반여성적이다는 부정적 평가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은 세태의 편향을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엄마를 부탁해]가 그려낸 부모에 대한 자식의 연민이 구시대적이고 신파적 감정 과잉일까요. 이런 감정을 객관적으로 분별해 내기 위한 방법으로 대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을 비교 감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전영일의 [아내의 화단]을 함께 읽는 게 적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식 셋을 낳아 애지중지 길러, 셋 다 출세를 시켜 놓았는데 키워낸 보람도 없이 노부부는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가 쓸쓸히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첫딸은 미국 유학까지 갔다와서 방송사에 취직해 잘나갑니다. 막내 아들은 의사입니다. 큰 아들은 미국 유학 중입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모은 재산은 막내의 병원 개업으로 다 줘 버리고 반지하 셋방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부인이 암에 걸리고 맙니다. 딸의 체면을 위해 원치 않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감내하다가 안락사로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남은 남편은 아내를 그리워 하며 외롭게 지냅니다. 동네 폐휴지 수거로 겨우 생활을 꾸려가지만 자식들한테 폐끼치지 않으려고 조용히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엄마를 부탁해]가 늙어가는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을 그렸다면 [아내의 화단]은 늙어가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렸으니 시점(視點)도 좋은 대비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입장이 참 많이 다릅니다. 두 작품의 자식들 품성도 꽤 대비적입니다. [엄마를 부탁해]의 자식들은 치매기가 있는 엄마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데, [아내의 화단]의 자식들은 참 얌체들이라 제것만 챙기지요. 어찌 보면 두 작품은 곧 돌아가실 늙은 부모를 둔 우리 자식들의 분열된 속마음을 쪼개어 각기 달리 그려낸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어느 쪽일까요. [엄마를 부탁해]와 [아내의 화단] 중 어느 작품이 더 우리를 아프게 할까요. [엄마를 부탁해]는 쓸쓸하게 늙어가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을 무럭무럭 키워 자식된 도리를 획복하게 만들까요. 아님 대리 만족을 통해 자신의 불효를 망각하게 만들까요. [아내의 화단]은 뻔뻔한 우리 속내를 뒤집어 염치를 자극할까요. 아님 세상 인심이 참 사나워졌다고 투덜거리면 자조하게 만들까요. 독자들이 이 두 작품을 읽으며 얼마나 불편할지, 얼마나 감동을 받을지 참 궁금해집니다. 그보다 먼저 제 소감을 고백해야 할텐데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네요. 어느 자식이 늙은 부모를 생각하면 짠해지지 않겠습니까만 원죄의 화인(火印)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니 난감할 밖에요.

 

미국 사람들에게는 [엄마를 부탁해]가 구시대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직 한국은 노년을 자식에게 의탁하는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말입니다. 노후 대책이니 장기 요양 체계니 하는 것이 아직은 걸음마 단계거든요. 앞으로 사회 시스템이 잘 갖추어지면 이런 관습적 감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벗어나서 자유로운 게 좋은 것일까요. 미국 사회가 사회 보장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한국이 겪고 있는 후진적 사회 병리 현상을 다시 겪게 되었다는 반증으로 [엄마를 부탁해] 현상을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좀 달리 보고 싶습니다. 이 작품에 주목하는 미국인의 감성에는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적 통찰이 일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연민과 죄의식마저도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해결하려고 드는 물질만능적 사고 방식에 대해 염증을 느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구한 감상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쿨해지는 것이 현대적인 것인지 의문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소위 성공한 자식 양육의 뒷그림자를 그린 [아내의 화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 원리에 충실하게 양육해낸 자식들은 늙은 부모의 부양 문제에 대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을 만들어 내겠지요. 구태의연한 관습적 감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현대적 삶이란 그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