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감성지수) 높이기

대공장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의 삶을 그린 소설 <파란 유령>

체거봐라 2012. 12. 9. 21:33

 

비정규직의 서러움

윤동수 단편소설 <파란 유령>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2007년에 만들어진 <비정규직 보호법>이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 밝혀내는 일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내 하청이 불법 파견이라는 대법원 판결은 이 문제가 이미 진위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한 셈입니다. 같은 작업 라인에서 똑같은 작업을 하면서 임금은 절반밖에 받지 못하는 걸 두고 옳고 그름을 왈가왈부 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부당한 일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겁니까. 근로계약의 자유니 고용형태의 다양화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노갈등이니 논란을 일으키는 건 정의의 원칙을 허물어 사익을 극대화하려는 저열한 꼼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고 합리적으로 논증하려는 수고는 참 부질없어 보입니다. 이 문제가 현장의 생생한 삶에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가슴을 치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은 그래서 더 절실해집니다. 절절한 현장의 여실한 형상화가 필요합니다. 글 쓰는 이들이 현장을 찾고 가슴을 쳐야 합니다. 관찰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적은 기록물은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작품을 찾아 널리 읽히는 일은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란 유령>은 대기업 사내 하청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사내 하청이 뭔지도 잘 모를 겁니다. 이게 얼마나 노동자를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을 겁니다. 기업들은 고용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원을 채용하기보다 용역업체에 일정 작업량을 맞겨 생산 라인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고용 비용을 절반까지나 줄일 수 있고 노무관리를 안 해도 됩니다. 노동자들이 반발하면 그냥 용역업체와 계약을 끊으면 됩니다. 기업주 입장에서는 참 편리한 셈이지요. 그러니 그 유명한 현대모비스 같은 업체는 사내하청이 70%를 넘는 거지요. 그런데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죽을 맛입니다. 옆에서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월급도 절반밖에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정식 직원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렇듯 비참한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하청 파견직을 서로 하려고 줄을 서있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나 일용직에 비해서는 훨씬 벌이가 좋다는 것이지요. 파견 노동자는 그들대로 정규직이 되기 위해 줄을 섭니다. 수천만 원씩 뒷돈을 대고 정규직을 따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권익 향상을 위해 단결하여 회사와 맞서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비정규직노동조합 하는 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가장 고귀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분들입니다. 제 잇속으로만 살아가는 속된 세상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입는 성자(聖者) 같은 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聖書)에나 있는 그런 일은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비웃는 게 우리의 비루한 삶이 아닙니까.

 

<파란 유령>은 대공장 비정규직의 현장을 우리 눈 앞에 그려 줍니다. 그 분들의 생생한 삶을 우리 가슴에 새겨 줍니다. 빛나는 투쟁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듭니다. 정규직은 작업복 차림으로 당당하게 퇴근하는데 파견노동자는 사복으로 꼭 갈아입고 회사 정문을 나옵니다. 작업복에 달려 있는 명찰의 색깔도 다릅니다. 정규직을 잘라낸 만큼 파견노동자로 채우니 정규직이 보는 눈길도 곱지 않습니다. 일이 고된 것보다 심정 상하는 게 더 못 견딜 노릇입니다.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집단 행동은 철퇴를 맞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단결 투쟁하는 일이 얼마나 험난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생계가 막연하니 투쟁 대열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가정이 파괴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인생 자체가 절단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눈 앞의 일로 목격하는 일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신에게 되묻지 않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시 묻게 만듭니다. 저 먼 이국의 위대한 정신 톨스토이가 우리 곁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걸 일깨워 줍니다. 아니, 나나 나의 혈육이 언제든 저 고통의 대열에 설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우리가 보다 더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이런 소설을 찾아 읽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