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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동물 - 김상남 단편 아동소설 <외톨이는 없다>

체거봐라 2014. 8. 13. 19:23

김상남 단편 아동소설 <외톨이는 없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다 키워 놓으니 은혜를 저버린다는 뜻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개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충성스러운 동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 제 잇속을 위해 배신도 서슴지 않는 사람 됨됨이를 일깨우곤 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인간이 짐승을 길러 고기를 얻듯이 자식을 길러 득()을 보려는 마음이 문제인 게 아닐까요. 진심으로 위한 게 아니라 시혜를 베풀듯 오만했던 게 아닐까요. 대가(代價) 없이 진심으로 위한 것이라면 서운한 마음도, 배심감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짐승의 충절 이야기가 사람의 속된 마음을 환기시키는 데 쓸모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를 나무라듯이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훈계하는 이야기로 읽힐 만한 작품은 경계해야 합니다. 아이에게는 따스한 감성이 깃들게 하고 어른에게는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찾는 일이 먼저입니다.

 

열 살밖에 안된 어린 애가 먼 도시의 옛날 살던 집을 찾아갑니다. 옛날 살던 집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날은 저물고 주차장이 되어 버린 공터 귀퉁이에서 한데잠을 자는데 밤 사이에 이사 가면 버린, 옛날 같이 살던 개가 찾아와 아이 품속으로 파고들어 잠이 듭니다.

 

지난 건 낡은 것이라 쉬 버리고 잊는 세태에 보잘 것 없는 지하 셋방 옛집이 그리워 찾아 나선 아이의 마음도 참 곱지만 타지(他地)로 가면서 버리고 간 강아지가 옛 주인을 알아보고 품속으로 파고드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찡했습니다. 참 소중한 건 쉬 잃어버리고 허황된 것만 좇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작품 읽기

 

외톨이는 없다

김상남


우리 집이 사라져버렸다. 숨이 턱 막혔다. 길을 잘 못 들었나…… 사방을 휘둘러 봤다. 옥수탕 굴뚝이 저만치에 버티어 섰고, 헌옷 수선가게 간판도 그대로다. 우리 집 자리만 빈터가 되어 버렸다. 머리가 핑 돌아 가방을 떨구었다. 털썩 주저앉았다가는 담벽에 기대어 다시 우리 집이 있었던 자리를 찬찬히 살폈다. 불이 났으면 숯검뎅이라도 있을 텐데…… 땅이 반듯하게 골라졌다. 주차장이었다.
우리 집이 앉았던 자리가 이렇게 넓었나? 그래서 더욱 믿기지 않았다. 담 너머의 석류나무도 처음 본다. 우리 방은 반지하방이어서 그 쪽은 한 번도 눈길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이층 베란다의 은빛 나는 난간도 낯선 풍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엉뚱한 곳을 우리 집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오죽 좋겠냐 싶어졌다.
허름한 의자에 앉았던 아저씨가 다가왔다. 아까까지는 의자가 비어 있었다. 주차관리원이었다. 거미처럼 어디에 숨어 나를 찬찬히 살핀 모양이다. 나는 여기가 우리 집이었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지휘관처럼 챙에다 금색 잎사귀 치장을 한 운동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뭐하고 있어?"
"……."
"쪼맨 놈이 어른 말을 들은 척도 않네. 집에 가라."
울음이 왈칵 쏟아지려했지만 꾸욱 눌렸다. 주차관리원의 어깨에서 늘어뜨린 호루라기만 보았다.
"집에 가라니깐… 집이 어디냐?"
"언제 여기에 주차장이 되었…."
"묻는 말에는 대답 안하고 되묻기만 해. 그런 거 알아 뭐 할래?"
"그냥요."
"너랑 말장난 할 사람 같냐? 몇 살이냐? 너."
집주인이었던 나를 몰라보는 주차관리원에게 고분고분할 필요가 있나 싶다. 그러나 심심풀이 삼아 자기가 궁금한 것만 자꾸 물을 것 같아 두 손가락을 죄다 쫙 펴보였다.
"열 살? 뺀들뺀들하게 생겼다. 왜 집에 안 가?"
내가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만 해댔다. 여기에 우리 집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더 성가시게 할 것 같았다.
가방을 들었다. 주차관리원은 자기가 이르는 대로 집에 가는구나 여기는지 의자 쪽으로 갔다. 가방 안에는 삶은 옥수수와 복숭아, 풋고추가 들어있다. 문득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이야 집이 찾아질 때까지 아무 데서나 한뎃잠을 잘 지라도 먹을거리는 아무 데서나 그냥 생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목이 마르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지만 역시 참아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꽉 메웠다. 내 옷이랑, 교과서랑, 게임기들은 어디에다 옮겼을까.
학교의 수도에서 물을 실컷 먹고 변소에도 들렀다가는 등나무 그늘이 있는 돌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를 만나게 될 날이 아득하리라는 예감이 스쳤다. 아마 또 배 타고 멀리 어딘가로 가셨으리라 여겨졌다. 아버지는 우리 집이 없어진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름방학 일 주일 전에 나를 고성의 할머니 집에다 맡겨 놓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아버지는 거추장스런 짐짝 하나를 내려놓아 어깨가 가벼워서일까 선걸음에 다시 부산으로 떠났다. 정류소까지 따라가 배웅했다. 아버지는 들판의 황새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역시 시골이 좋아. 공기 맑고, 먹을 것 넉넉하고……."
내가 시무룩해 있자 아버지는 머쓱한지 개망초를 꺾어 코에 대더니 내게 내밀었다.
"우리도 돈 벌어서 여기에 황토방 집 하나 지어 살아야 할 터인데……."
나를 언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않고 시골 사는 게 아주 행복하다고만 말했다.
할머니가 사는 데는 외딴 오두막집이지만 황토방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황토방을 하나 더 바랬다.
집벽은 온통 파란 담쟁이 덩굴로 덮였고 지붕에도 버섯이 돋아있었다. 옹달샘이 있는 벼랑머리에도 달맞이꽃풀과 칡이 엉켜 있는데 할머니가 다니는 길은 따로 있었다. 할머니 혼자만 알고 있는 길이었다.
화면이 얼룽거리는 텔레비전은 할머니도 켜지 않았다.
두부모만한 비상통신기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처음 보는 기구였다.
"여기를 꾹 누르면 지서 순경이 달려 온단다."
"뭣 땜에 불러요?"
"아프거나, 도둑이 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거 아니냐?"
할머니는 연습 삼아서라도 절대 함부로 누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고장났는지 알아본다고 이집 저집에서 마구 눌렀기에 119까지 들이닥친 일이 벌어졌고 어른들은 책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무슨 책인데요?"
"책이 책이지 뭣이 있나?"
"왜 없어요. 동화책, 위인전, 만화책…."
"공부책 아니고, 야단 말이다. 벌금을 물 뻔 했단 말이다."
"아, 문책이란 말이네."
"책이나 문책이나… 그래, 공부 재미나니? 니 애비도 어릴 땐 영리했다. 네 어미는 한 번 찾아 왔더나?"
"몰라요."
"할미가 묻는데, 그리 뚝 짤라 버리면 어짜노? 그래 안 보고 싶냐?"
"모르겠다니까요."
"그래 이제 그런 소리 안 물을게… 그만 자자."
나는 할머니가 더 끈질기게 캐물을 것이라고 여겨져 지금 대답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왜 안 보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사진도 없애버리고 해서 얼굴도 잊어버렸어요."
"그래, 다 소용 없는 일이다. 일찍 잊어버리는 게 낫다. 할머니랑 살자."
할머니는 텃밭에서 하루 종일 지냈다. 나는 개울에서 멱을 감거나 그늘에서 잠을 잤다. 개미가 물어 잠이 깨면 어스름이 깔리고 건너편 솔밭에는 하얀 수건 같은 게 널려 있었다. 황새였다.
할머니는 나와 함께 살지 않아도 심심치 않을 것 같았다. 들고양이, 다람쥐, 비둘기가 들락거리고 비가 오니 두꺼비도 마루 밑에서 지냈다.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할머니 한 분이 가끔 비닐 봉지에 뭘 담아 찾아왔다. 그대로 할머니처럼 주름은 없는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하얗고 모시옷까지 입어 여자도사 같았다. 아들 셋이 모두 도시에서 성공해 용돈이 많다고 나의 할머니가 말했다. 오두막살이에 웬 옷이 그렇게 많은가 싶었는데 모두 이 하얀 할머니가 준 옷이었다.
"이 애가 중국며느리가 낳은 손자인가 보네. 잘 생겼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꼬라지는 제 에미 닮아서…… 사내는 인물보단 체격이 실해야지…… 제대로 못 먹고 커서……."
"나중 크면 에미 찾을기라. 인제 중국도 맘대로 내왕하니……."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이미 알고 있어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외갓집이 있는 중국의 흑룡강성에 갈 작정으로 저금하고 있는 줄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할 때가 아니라 여겼다.
방학 동안에 학교는 창문틀 갈아끼우는 공사로 축구는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나, 휴대폰도 되지 않았다. 배를 타고 멀리 가신 게 분명했다. 동회에서 복지사 누나가 찾아오시어 또 고아원에 보낼지 모르겠다. 도리 없다. 그때까지 외톨이로 살아나가야지……. 유모차를 밀고 할머니가 지나간다.
어두워지니 나무들은 더 가까이 모여 수런수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우리 집이 사라져 버린 그 자리로 다시 찾아들었다. 밤이어서 주차관리원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 반 지하방이 있던 꼭 그 자리에다 종이상자를 깔았다. 할머니가 주셨던 옥수수를 꺼냈다.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아버지랑 함께 먹으려고 아꼈는데…… 더 상하기 전에 다 먹어치우기로 했다. 벌렁 누웠다. 별 하나가 손에 닿을만치 가깝게 보였다. 찬찬히 살피니 숨었던 별들이 많았다. 내일은 뭘하나 생각하다가 별을 찾다보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 것 같았다.
잠결에도 내 옆에 누가 누워 있음을 알았다. 만져보니 뜨뜻하고 부드러웠다. 녀석은 내 팔뚝을 핥고 주둥이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타로시>였다. 내가 분명히 여기에 나타날 줄 알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할머니 집에 갈 적에 쫄쫄 따라오기에 쫓았더니 꼬리를 늘어뜨리고 골목으로 사라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녀석의 목을 껴안았다. 혼자 어찌 살아가나 하는 걱정이 싹 가시었다.
큰길에는 새벽길 버스가 불을 켠 채 지나간다. 나는 이제 우리 집 아닌 주차장을 나와 큰 길로 힘차게 달렸다. <타로시>도 내 뒤를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