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학살과 성조기
제주 4.3학살 69주년이 되었다. 제주도민의 십분의 일이나 끔찍하게 죽인 대학살이었다. 이 참극을 미군정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게 밝혀진 지 오래다. 시위대가 들고 나온 성조기가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 4.3의 참상을 겪은 분들이 이걸 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제주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눈곱만큼이라도 공감해 보았다면 도저히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4월 1일 탄핵무효 국민저항 총궐기 국민대회
제주의 아픈 역사를 전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4.3학살을 소설로 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금기시되던 4.3 학살 이야기를 처음 전한 작가 현기영은 1978년에 <순이 삼촌>을 발표하고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다. 그의 희생으로 4,3의 진실은 널리 알려졌고 결국 ‘제주도 4.3사건 진상조사위’가 꾸려져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었고 2014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순이 삼촌>은 19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주변 마을 주민들 1천여 명을 북촌국민학교에 모아놓고 군경 직계가족을 가려내고는 모조리 너븐숭이(돌밭)에다 몰아넣고 학살했다. 죽인 이가 3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너븐숭이 비탈에 들어찬 수십 기나 되는 애기무덤은 그 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순이 삼촌>은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번갈아 악쓰며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었지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도무지 헤어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서로 이름 부르며 가족을 찾는 소리와 군인들의 악에 바친 욕 소리로 운동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 현기영 <순이 삼촌> 중에서 -
강요배 그림 <젖먹이>
이런 끔찍한 일이 정말 있었을까. 현기영 <순이 삼촌>과 강요배의 <젖먹이>는 과장이 아니다. 그날 북촌국민학교에 있었던 주민들은 이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너븐숭이 시체 더미에 묻혀 가까스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평생 치를 떨며 살았다. 그때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걸 혼자 살아남은 게 천추의 한이 된다. 눈 덮인 너븐숭이 돌담 곁에 누워 죽어 있는 모습이 차라리 평온해 보인다. ‘순이 삼촌’이 자살한 너븐숭이 애기무덤 앞에 [4.3평화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이 많이 찾아온다. 학생들은 애기무덤에서 무엇을 볼까.
제주 4.3평화공원 ⓒ 전세연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 터였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글씨로 적힌 이 글귀는 아직도 나의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아름다운 풍경, 섬 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인 이 제주도에 이런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제주 4.3사건에 대해 무관심하다. 3학년이 되어 3월 중반에 제주 4.3사건에 대한 글로 문예공모에 참여한다고 내가 말했을 때 친구들 모두가 싸늘한 반응이었다.
“정신 차려. 너 고3이야.”
“하루하루가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딴 대회에 나가서 왜 시간 낭비를 하냐.”
지금까지도 나를 어리석게 쳐다본다. 4.3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찾고 한 자 한 자씩 써내려가면서도 눈물을 흘린 나에게 ‘이딴 사건’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열이 받은 나는 항상 되물어본다.
“너 제주 4.3사건을 알고도 이딴 대회라고 말하는 거야?”
대답을 하는 친구들의 말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 그 까마귀 많던 공원 간 거? 그거밖에 기억 안 나는데.”
“수능 한국사 시험에도 안 나오는데 그런 걸 내가 왜 알아야 해?”
“일본인들이 한 거 아냐? 조선시대였나?”
수능 시험에 안 나온다며 나와는 상관없다며 알아야 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친구들은 작년에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것도 잊어버린 듯하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답답하고 무고한 희생자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물론 친구들 말대로 2011년 이후로 ‘제주 4.3 사건’은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책에 적혔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짧은 두어 줄로 적혀 있다. 그 때문인지 친구들은 이 사건을 알 이유가 없었고, 오직 수능에만 나오는 일제 강점기만 열심히 외울 뿐이었다.
- 인성여고 전세연 학생 <또똣한 제주 아픔> 중에서 -
아픔을 공감하는 게 먼저다. 공감보다 더 귀한 공부가 있을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참상의 원인을 추적하게 된다. 그렇게 역사의식이 가슴 속에 자리를 잡는다. 해방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일제보다 더 끔찍하게 인민을 학살할 수가 있는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해방은 신탁 찬탁, 좌우 분열로 치달았고 단독 정부 수립으로 나라가 쪼개질 판국이었다. 이 와중에 제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원인을 간단하게 짚어보자.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으로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섰다. 독립 투쟁을 해왔던 분들이 인민의 지지를 받아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가 자생적으로 성립되었는데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인민위원회는 해체되고 만다. 미군정은 친일 매국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지배 체제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남한을 관리하고자 했다.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해 남한 내 신탁통치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제주도에 반공 폭력배 서북청년단을 투입하여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한 배후에는 미군정의 이런 모략이 있었던 것이다.
4.3에 발발한 유혈사태가 중단되고 4.28 평화협상이 이루어져 제주도는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졌다. 제주도 주민의 대다수를 빨갱이로 몰아 몰살시키려는 초토화 작전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미군이 사주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무장 공비가 방화 주범이라고 선전하는 ‘제주도 메이데이’ 영상을 만들어 배포하고, ‘서북청년단’이 방화 주범이라는 조사 결과를 보고한 ‘김익렬’ 6연대장을 전격 해임하였으며 미군 수뇌 딘(William Dean) 소장은 5.10 선거 전에 무장대를 완전 소탕하라고 명령하였다.
1948년 5월 5일 제주도에 온 딘 소장(왼쪽에서 두 번째)
제주 4.3 학살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이는 서북청년단을 토벌 작전에 동원한 작전참모 ‘최치환’이다. 이 자는 일제시대 때 만주 신경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중위로 복무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내무부 치안국에 소속되어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했고 4.3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진압경찰의 지휘관 작전참모로 제주에 파견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내무부 치안국의 기록 ‘한국경찰사’, 최치환 추모회 ‘금암회’에 기록된 약력). 그는 이렇게 반공 정권의 인정을 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박정희 정권 때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했고 유신 시대에는 경향신문 사장, 전두환 정권 때에는 삼성반도체 사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야말로 이 나라 권력의 심장부였다. 제주도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서북청년단은 그의 지휘를 받았다.
해방 직전의 국제 정세를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해방이 아니고 식민지 양도였다. 승전국 미국과 소련이 나눠먹은 것이다. 본토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나서도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일본이 소련이 참전 선언을 하자 곧바로 항복을 해버렸다. 그렇게 강대국들끼리 판짜기 하여 우리 조국은 분단이 되었다. 북한에서 공산당과 철천지원수가 되어 월남한 이들이 만든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파견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민족 통일을 짓밟을 이념 분단을 꾀했던 것이다. 그 밑그림을 미군정이 짰고 친일 매국노들은 미군정 밑으로 들어가 또 민족을 배신한다. 그들에게는 성조기가 생명줄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