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스토리텔링

영화로 공부하는 철학 - 자각(自覺) [사랑의 기적]

체거봐라 2021. 5. 21. 09:07

체제에 길들여져 주체성을 잃으면, 즉 소외되면 어떨까요? 보통 소외되는 것을 따당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많이 불쾌하겠지요. 그런데 철학 개념 소외라는 건 제 스스로 어떤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이라 따당하는 것처럼 불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익숙하게 습관화되는 게 편한 거 아닐까요. 소외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면서 실존(實存)으로 거듭나기 위해 각성한다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일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냥 편하게 큰 흐름에 섞여 함께 어울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외된 자신을 직시(直視)하면서 자기 존재의 허상(虛像)을 자각하게 되면 다시는 그런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굶주림에 시달린다 한들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겠습니까. [사랑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자각의 기쁨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원제목이 [Awakenings]인데 [사랑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네요.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인데, 원제목처럼 자각한다(awake)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골치 아픈 영화이기도 해요. 우리 삶 자체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 그냥 최루성 영화는 흉내도 못 낼 깊은 감동을 줍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영화로 만들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곤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판타지(fantasy)나 낭만이 즐거울 테지만 대중문화의 인간 소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는 비현실적인 환상 이야기가 전혀 환상적이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실제 우리 삶만큼 환상적인 게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삶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자가 지어내는 이야기에서는 역겨운 비린내가 날 정도입니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철학적 메타포도 깔려 있어 감동의 깊이가 장난이 아닙니다.

 

기면증에 빠진 모습

 

원인 불명의 기면증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 이야기입니다. 뇌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거의 시체와 다름없이 온몸이 경직된 환자들이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깨어나게 됩니다. 번역된 제목처럼 진실한 사랑이 기적을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뇌염으로 인해 심각한 신경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 수십 년 동안 병상에 누워서만 지내고 있는데 어떤 의사 선생님이 새로 오면서 기적같이 깨어납니다.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병상에 돌처럼 굳어있었던 그들이라는 게 믿어집니까. 이게 다 새로 오신 의사 선생님의 사랑 덕분이랍니다. 그 분은 다른 의사들이 보지 못하는 환자의 내면을 꾀뚫어 보고 하해(河海)와 같은 사랑으로 늘 환자들과 함께합니다. 환자들은 그분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기막힌 처방을 받으면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위대함을 참으로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인데 한편으로는 이기적 세태에 물들어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현대인의 소외를 풍자하고 있는 것 같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번역된 제목이 작품의 깊이를 잘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그대로 번역해서 [깨어난다는 것]이라고 하는 게 훨씬 좋을 텐데 말입니다. 현실이 감당하기 힘들 때에는 내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환상의 세계를 꾸며볼 만도 할 겁니다. 우린 노상 꿈꾸자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만큼 현실에서 벗어나 보자는 거겠지요. 정말 힘들면 좀 물러나 관조(觀照)하라고 충고하기도 하잖습니까. 맞아요. 꿈꾸는 것마저 허용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만큼 깨어나라는 말도 자주 듣는 말입니다. 환상은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환상에 길들여지면 현실에 적응할 수 없어 현실 세계로부터 도태되고 만다는 말이잖아요.

 

깨어난 뒤의 모습

 

자각(自覺)한다는 것,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누구나 자유로와지고 싶어하는데 자유로와진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배움() 없이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깨달을 각)이라는 글자가 (배울 학)(볼 견)이 결합된 글자인 것만 봐도 깨달음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보는 눈을 갖추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로 보기 위해서는 바른 눈을 가져야 되는데 바른 눈은 그냥 날 때부터 갖게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 부단히 배워야 비로소 자유로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유(自由)라는 말도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두 글자가 결합된 말로 '내 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이니 말의 뜻만 간단하게 풀어봐도 배우지 않은 자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들을 다 추려내고 남는 게 무엇인지 따져 봅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누군가에게서 들어 알게 된 것이고 단순한 취향마저도 사실은 누군가 나에게 세뇌시킨 게 아닙니까.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나의 취향은 사실 매체를 통해 나에게 주입된 광고의 결과물이잖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취향은 자신의 개성을 이룬다고 착각을 합니다. 이건 참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주입된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가면 나중에 남는 게 없게 됩니다. 그러니 나는 자유로운 게 아닙니다. 아니 내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할 수조차 없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독일 철학자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우린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라 실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있다고 설파한 것은 바로 이런 부조리를 명쾌하게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인 게 아니지요. 뭘 몰라서 그런 유치한 주장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늘어놓는 겁니다.

 

골치 아픈 철학적 문제라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영화가 많습니다. [사랑의 기적] 뿐만 아니라 [혹성 탈출 ; 진화의 시작]도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뇌세포를 활성화하여 급격히 머리를 좋게 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자유의지'의 의미를 묻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꽤 오래된 영화로 [매트릭스][트루먼 쑈]도 자아(自我)라는 게 본질적으로는 문화와 체제의 부산물이라는 아이디어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이 환상적인 이야기로 존재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엑스페리멘트]는 실화를 통해 이 문제를 탐구하고 있어 학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니 철학 인식론 주제와 관련되는 영화 작품이 꽤 많군요.

 

인식론을 깊이 파고들면 존재론과 통하게 됩니다. [사랑의 기적]에 등장하는 기면증 환자들의 깨어남은 인간의 자각을 비유하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 없는 돌덩이 같지만 사실은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있으며 타인과 교감도 하고 있는, 사유하는 인간 존재였던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존재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철학적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본질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존재하고 있는가, 이렇게 자문(自問)하게 되면 비로소 철학적 사유에 빠져들게 되고 인간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존재의 의미, 자유의 본질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펴고 있는 소설로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부자 은행가와 가난한 변호사가 사형제도에 대해 찬반 논쟁을 하다가 내기를 걸게 됩니다. 부자 은행가는 사형보다 종신형이 더 비인간적이라고 하는데 변호사는 나 같으면 종신형을 택하겠다고 하며 반대합니다. 논쟁이 치열해지다가 나중에는 은행가가 15년간 독방을 견디어 내면 엄청난 돈을 안겨주겠다고 내기를 걸게 됩니다. 가난한 변호사는 내기에 응해 15년을 독방에서 지내게 되는데 마지막 날 엄청난 돈을 포기하고 독방을 스스로 걸어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이 작품이 독자에게 묻고 있는 건 '누가 자유로운가'하는 문제입니다. 독방에 갇혀 젊은 생을 다 보낸 자는 진정한 자유를 얻고 그를 가둔 자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느냐는 아주 역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꿈꾸는 자유, 해방, 행복이라는 게 과연 진정한 것인가 되묻게 됩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이 실상은 모두 허영이지 않은가 회의를 하게 됩니다.

 

카프카 소설 [변신],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존재인가, 허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철학 이야기입니다.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던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하면서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환상적 이야기인데 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소설로 손꼽히고 있으며 특히 신존철학자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이해하기에 유용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마디즘은 우리 말로 유목주의로 해석되는데 유목민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떠도는 것처럼 우리는 특정 사고방식 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찾아 사유의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낸 사상입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 기성 관념에서 탈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자칫 잘못하면 정신분열증 환자로 내몰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자유롭기 위해서는, 실존적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에서 벗어나 깨어나야 한답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현실 논리에 충실하게 적응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와지는 것일까요? 체제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제멋대로 환상을 꿈꾸면 자신을 해방시키게 될까요? 배운다는 것은 통념에 익숙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배워서 각성한다는 것은 통념을 내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울수록 체제에 편입되어 몰개성화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배후에 숨어 있는 꼭두쇠의 조종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는 순간 무화(無化)되고 맙니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의지를 가질 수는 없으니 자유를 노래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나는 호모 사피엔스, 사유하는 존재가 맞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