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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의 우두머리 정철

체거봐라 2010. 2. 6. 09:55

살육의 우두머리 정철 


정철이 기축사화 때 반대파 선비를 1000여 명이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의 문학 작품이 어떻게 읽힐까? 그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은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치는 고전 작품인데 학생들이 그의 잔인한 면모를 알면 그의 작품이 서정적으로 읽힐 수 있을까. 작가의 삶과 분리하여 작품의 내적 완성도만을 논하는 문학은 의미가 있을까. 우리 문학사에서 정철은 그 비중만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가이다. 그의 정치적 이력을 알게 되면 그를 문학 예술인으로 여기는 게 쉽지가 않다.


정철의 잔인한 면모는 어릴 때의 경험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정철은 어릴 때 궁궐에서 살면서 왕가의 일상을 낱낱이 경험했다. 그의 두 누이가 왕족과 결혼했으니 궁궐을 제집 드나들 듯 했고, 나중에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는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그가 10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났으니 어린 나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을사사화 때 죽임을 당한 왕족 계림군은 정철의 매형이었다. 계림군은 배다른 형제인 인종과 명종의 사촌 형제 뻘인데 명종의 왕권을 공고히 하려고 그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는 반대파 윤임 세력이 계림군을 옹립하려고 한다는 혐의를 씌웠으니 계림군의 처남인 정철과 그의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건 뻔한 일이었다. 정철의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기도 했으니 정철 집안은 윤원형이 보기에 반대파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정철의 형이 당시 이종정랑(인사 책임자)이라는 요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철 집안은 윤임 세력의 특혜를 받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을사사화는 외척간의 권력투쟁 결과인데 중종의 자식으로 왕위를 계승한 인종과 명종이 배 다른 형제간이라 외척간 권력 다툼의 소지를 안고 있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지배 질서의 혼란을 더했다. 인종과 인척 관계에 있던 윤임 집안과 명종과 외척 관계에 있던 윤원형 집안은 권력을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고 만다. 을사사화를 사림의 재앙이라는 의미의 사화(士禍)라고 부르는 이유는 윤원형이 과도한 숙청 작업에 대해 비판을 가한 사헌부 사간원을 탄압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외척간의 권력 다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철은 총명하여 공부를 잘 하기도 했지만 처가의 도움을 받아 좋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정철의 [성산별곡]은 처가가 있던 성산을 노래한 것이고 처의 할아버지 주선으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기대승의 문하에 들 수 있었으며 그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서하당 김성원도 처가 쪽 인물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장원급제하여 출세 가도를 달렸으며 명종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하니 권력의 핵심으로 빠르게 진출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정철이 서인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정철 집안이 무너지게 된 을사사화 때 사화를 일으킨 윤원형 집안은 정철에게 있어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의 성장으로 외척의 권력은 상당히 약화되긴 했지만 윤원형은 아직 건재한 상태였다. 사림은 윤원형 세력을 견재하기 위한 뜻에서는 별 이견이 없었다. 그러니 서인 당파 형성의 시초가 되었던 심의겸의 윤원형 비판은 사림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정철이 그를 지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