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소설 4

꽃잎은 떨어져

내가 왜 그 자리에 있었던가. 기억들이 조각조각 찢어지어 파편화되니 듬성듬성 구멍이 나기 시작한다. 이러다가는 큰 줄기마저 다 잊혀지고 말아 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허탈한 심정이 자꾸 내 가련한 생을 들춘다. 1991년, 30여 년 전의 일이니 잊혀질 만도 하지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픈 상처는 저승에 가도 잊혀질 수 없고 깊은 상처일수록 꽃을 피워내기 마련이니 기억의 파편이 사라지는 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으리라. 전두환 정권을 이은 노태우 집권기였다. 광주 학살로 권력을 잡았던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 조치로 군부 독재를 지키려 하자 민주화운동은 들불처럼 일어나 결국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기 이전에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았다. 1960년 4..

창작 소설 2022.07.06

단편소설 <동백꽃 인연>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마름 집 딸 점순이는 소작농 아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자꾸 집적거린다. 남자애가 제 마음을 몰라주니 신경질이 났을 것이다. 맛있는 감자를 줘도 싫다고 하고 닭싸움 놀이를 하자는데 화부터 내니 미워 죽겠나 보다. 소작농 아들은 마름집 애가 자꾸 그러니 자기를 업신여긴다 싶어 어깃장을 놓을 수밖에. 큰 싸움이 날 지경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둘은 동백꽃에 파묻혀 쓰러지며 부둥켜안게 된다. 찌릿찌릿 뭔가 통한다. 사춘기 남녀 애들이 서로 껴안고 꽃밭에 쓰러지는 장면이 마음을..

창작 소설 2022.03.17

유정의 녹주 사랑

젊은 시절 박녹주와 김유정 김유정은 젊은 시절 스켄들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휘문고를 다닐 때 판소리 명창 박녹주에게 반하여 스토킹을 한 일이 유명하다. 김유정이 목욕탕 앞에서 박녹주가 나오기를 기다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박녹주가 목욕을 하고 공중목욕탕을 나서고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릿결은 더욱 눈부셨고 말갛게 씻긴 새하얀 얼굴 살갗이 꼭 애기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정의 가슴은 금방 터질 듯 두근거렸다. 녹주는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일거수이투족은 유정 눈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는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녹주의 앞에 유정이 나서며 길을 막았다. "누구신지?" "선생님의 소리를 좋아합니다." 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요?" "선생님께 전하고 싶..

창작 소설 2022.03.15

단편소설 <아픈 꽃 >

그 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에게 총 맞아 죽은 그때쯤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과 고향이 같다는 걸 나중에야 알고 그 인연이 참 묘하다 생각했지만 그 나이 때는 시간을 거스르는 인연의 끈을 짐작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 처녀 선생님이 박정희 대통령과 한 고향 사람이란 것도 신기하지만 그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올 줄은 꿈에도 짐작할 수 없었다. 무슨 운명인가 싶은데, 선생님이 우리 집을 방문한 건 박 대통령 저격 사건 수십 일 전이었다. 그 때 나는 영양실조로 왼쪽 무릎 관절염이 심각해져 두어 달 동안 학교를 못 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탄광 광업소 입구에서 광부들을 상대로 한 손목시계 나까마(행상)로 보잘것없는 돈벌이를 하셨고 어머니는 화장품 외판 일로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셨다. 두 분이 그..

창작 소설 2021.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