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은 국경일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3.1만세 운동이 무오독립선언에서 비롯되었으며 만주와 국내 독립선언을 조직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라는 것과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을 포함한 모든 독립선언의 출발점에 신규식 선생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3.1절 기념일을 맞아 상해, 간도, 동경, 서울에서 일어나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독립선언 항쟁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 일을 구상하고 실행한 선각자로 어떤 분들이 있었는지 되새겼으면 합니다.
신규식 선생은 조선인으로 중국 혁명에 주도자로 참여하신 분입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진독수와 이웃집에 살며 친하게 지낸 친구였고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과도 가까운 사이였던 신규식은 조선 독립 운동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몽양 여운형,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등 조선 해방 운동의 정신적 구심이라 할 만한 혁명가들을 다 길러냈습니다.
상해 임정을 말할 때에는 김구 선생을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은 상해에서 배출된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은 신규식 선생의 제자들입니다. ‘동제사’와 ‘박달학원’을 꾸려 독립투사를 길러내고 이들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은 독립선언을 조직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이 모든 일의 구심이었습니다. 상해 임정이 중국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신규식 선생 덕분이었습니다. 선생이 중국 신해혁명에 가담하여 손문과 함께 싸운 동지였기 때문에 상해 임정은 중국 정부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KBS 3.1절 특집 [김마리아,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다] 김마리아 부산항 입국 장면
신규식 선생은 만주에 여운형을 보내어 무오독립선언을 조직하게 하고 일본으로는 장덕수와 이광수를 보내어 2.8독립선언을 조직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3.1운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 청년들이 2.8독립선언을 하고 그 선언서를 여성 독립투사 김마리아가 국내로 몰래 들여왔습니다. 2.8독립선언이 있기 한 달 전에 만주 간도 지역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먼저 있었습니다. 선언에 참여한 인사들은 보면 무오독립선언이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독립선언이 신규식 선생에 의해 조직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독립선언 운동이 상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귀결됩니다.
임정을 세울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광범위하게 독립선언을 조직하는 등 임정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신규식 선생을 우리는 왜 잘 모르고 있을까요.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선언의 힘으로 정부를 세웠지만 그 정부의 수장 자리는 이승만이 차지합니다. 이승만의 농간으로 임정이 분열되자 신규식 선생은 원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자결하고 맙니다. 조선의 독립 운동사에서 피눈물이 날 만한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김갑수의 [제국과 인간]은 이러한 3.1만세운동 전후의 실상을 정확히 그려낸 작품입니다. 특히 다음 장면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차며 비웃었다고 했다.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 김갑수 [제국과 인간] 中에서 -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는 장면은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지만 그 실상을 직시해야 할 듯합니다. 파고다 공원에서 벌이기로 계획했는데 군중의 격동을 겁내 이완용의 별장이자 기생들과 놀아났던 요정으로 옮겨 치렀다니……. 요릿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경에 자진 출두한 민족대표들 중 상당수는 친일로 변절하고 맙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최남선이 쓰고 요릿집에서 낭독된 독립선언서를 읽고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장면을 적당히 가려서 될 일이 아닐 듯합니다.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과는 달리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한 지사들 중에서는 친일 배신자가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