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정조대왕은 독살되었는가?
비원을 다녀온 게 언제쯤인지 가물가물 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비원 관람은 참으로 생각 없는 관광이었네요.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이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인 것도 몰랐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아무 생각 없이 다녀온 비원 관광이 영 의미없는 짓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요즘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읽고 있는데 정조의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바로 제가 생각 없이 보아 넘겼던 비원 부용지 주변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의문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약용을 위시한 규장각 閣臣(각신)들의 골몰하며 드나들었던 부용지 근너편 주합루의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합니다. 생각 없이 다녀온 비원행이 한낱 산보로 쉽게 잊혀질 허튼 짓이 아니게 되어 새삼스레 다행한 것입니다.
창덕궁의 한 부속 건물인 내의원 옆으로 오르면 부용지라는 아담한 연못에 다다릅니다. 아래 사진은 가족들과 비원 산책을 할 때 촬영한 것인데 가을 단품이 너무 아름다워 담아왔지만 그때는 이 돌담길이 정조대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신하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규장각으로 오르는 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길이 슬픈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처연한 단풍 빛에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르겠네요. 궁내 세력가들이 온통 서인 일색이었던 때에 남인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구습 혁파를 위해 온몸을 던졌던 그들의 외로운 투쟁이 기왓장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줄 알았다면 저 단풍이 그냥 곱지만 않았겠지요.
부용지 건너편에 바로 보이는 건물이 정조대왕 집권기에 임금이 전용으로 사용하던 도서관인 규장각으로 썼던 건물입니다. 지금은 주합루라 불리고 있습니다.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의 일을 두고 '만약 ……했다면' 하고 가정법을 쓰는 일만큼 부질없는 일이 없겠지요. 앞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전후의 당쟁에 대해 말할 때에도 참담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었는데 정조대왕의 개혁 정책을 가로막아선 기득권 세력의 악행을 접할 때에는 도가 지나쳐 무기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정조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다시 왜놈들에게 짓밟히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정조가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가장 신뢰한 인물은 채제공과 정약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남인 계열에 속하고 퇴계와 성호(이익)의 학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익의 문하 중에 권철신은 이승훈의 전도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그가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서 서학교리연구회(西學敎理硏究會)를 만들어 서학을 연구할 때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도 함께 했으니 성호 이익의 후학들은 대부분 천주학을 내면화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조선천주교를 창립한 이벽은 이익의 손자인 이가환과 함께 공부했고, 정약용 집안과는 겹사돈간이기도 합니다. 정약용의 큰현 정약현이 이벽의 누이와 결혼했고 이벽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겠습니까. 신유박해로 천주학자들이 몰살당하게된 계기가 된 사건은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의 천주학 관련 서적 적발 사건이었습니다. 정조대왕이 죽은 다음 해의 일이었습니다. 정조대왕이 남인을 적극 등용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노론 세력 중 특히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벽파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반대파, 즉 노론 시파와 남인을 숙청하려고 합니다. 사학(邪學;간사한 학문)을 배격하고 유교 질서를 바로잡는다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이 처형되고 정약종의 형 정약전 동생 정약용은 귀향을 갑니다. 그해에 터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정약용과 그의 둘째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끌려올라와 다시 심문을 받게 됩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였으며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든 세력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구실이었지요. 황사영은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고 정약전은 흑사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선왕(정조)의 말년에 남인이 다시 나뉘어 두 파가 (攻西派와 信西派) 되었습니다. 그 한편은 이가환 (1742~1801 남인학자) 정약용 (요한 1762~1836 실학자)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홍낙민 (루가 1740~1801) 등 몇몇인데 모두 전에는 주님을 믿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님의 가르침을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 당파의 사람은 수가 아주 적어서 세력이 몹시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황사영 백서 일부>
백서의 내용을 보면 다산이 속으로는 신심을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배교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황사영이 정약용을 평한 것에 대해 다산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자신의 배교에 대해 부끄러워 했을까요?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백서에 일부 들어 있습니다.
조선이 계속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면 청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해야 하며, 서양의 큰 배 수백척과 군대 5만~6만명을 보내 조선 조정을 위협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해달라. <황사영 백서 일부>
백서의 이 부분이 바로 황서영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부분입니다. 다산이 황사영을 역적으로 비난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다산의 아버지가 자식들의 천주학 연구를 질타하고 그 형제들 간에도 갈등이 생겼을 때 다산은 종교로서의 천주학과는 거리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형조에서 황사영의 서간 등 증거물을 조사할 때 다산의 이런 입장이 드러났고 황사영이 능지처참 당할 때 그는 살아남은 것으로도 그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는 믿음을 유지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겉으로 배교한 척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그는 서구 과학에 대해 관심이 높아 자연스럽게 천주교까지 접했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 국체까지도 져버릴 수 있는 황사영과는 분명히 입장이 달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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