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의 [성호사설]을 읽다가
- 당쟁과 실학자의 계보 -
임란과 호란은 조선 지식인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무력감과 난세를 수습해야 하는 책무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국제 질서와 권력구조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외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 한 번 하지 못할 정도로 나라는 망해 가는 상황이었다. 외적이 쳐들오기 전에 이미 조정은 살육의 전쟁터였다. 임란이 일어나기 불과 삼 년 전인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선비들이 1000여 명이나 죽어 나갔던 것이다.
선조의 견제로 위축되었던 서인 세력은 정여립 사건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정여립의 모반을 재기의 기회로 포착한 서인 세력은 정철을 내세워 동인 세력을 철저하게 속아낸 것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정철은 선조의 후사 문제로 실각하고 서인은 세력을 잃게 된다. 이런 권력 다툼은 집권 세력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고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력하게 만들었다. 전란으로 인한 황폐화는 이런 부패와 무능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의병을 이끌어 유림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곽재우 등 의병을 많이 배출한 조식의 문하는 동인 대북 파벌을 주도하며 광해군을 옹립하고 선조의 돌연한 죽음으로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후금과 명 사이의 중립외교 노선을 갖게 된 것은 북인의 정책적 판단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광해군 집권기에 실학 사상의 씨앗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세치용 학파를 일군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퇴계와 남명을 높이 세웠는데 그가 조식의 문하와 연결되고 특히 정인홍을 높이 평가한 만큼 북인의 학풍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쟁이나 일삼으며 권력 투쟁에만 부심했던 무능한 위정자들을 질타하며 초야에 묻혀있던 남인의 후학들은 광해군을 맞아 그들의 경세관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부를 제대로 펴 보지 못하고 인조반정을 맞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은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지만 실력을 바탕으로 한 정당한 세력 형성이 아닌 것이 바로 증명된다. 병자호란을 맞아 서인 세력들이 대처한 양상을 보면 임란의 충격이 실질적인 실력 양성으로 전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부의 권력 다툼은 더욱 심화된 듯한 한심한 양상을 연출한다. 남한산성 농성과 삼전도의 치욕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농성 중 대립했던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서인이었지만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대립하였다. 서인 내부에서도 명분론과 실용론이 분열되어 대립하게 된 것이다.
병자호란과 정묘재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 대한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 때 국제 질서에 대한 실용적 대응이 기조였는데 이는 인조반정으로 끝장난다. 서인이 득세했던 인조 집권기에는 명분론이 우세했고 그 결과가 병자호란이라고 보면 된다. 북방의 오랑캐가 중국 전체를 장악하게 되자 명분론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인 당파에서는 현실론이 대두하게 된다. 북학파의 성립은 서인 세력의 현실 인식이 낳은 결과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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