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팩션 한국사

김홍도와 신윤복은 동성애 관계?

체거봐라 2012. 3. 21. 13:00

분단의 원인을 밝히려면 일제강점기를 살펴볼 수밖에 없고 국권 침탈의 원인을 밝히려면 구한말을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구한말의 정세는 정조의 조선과 직접 잇닿아 있으니 영정시대가 역사학도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시대가 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그 시대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당대 시대상을 고스란히 체화한 전형적 인물이 눈에 띄게 마련인데 저한테는 그 첫 인물이 정조 이산이었습니다. 18세기 조선 사람으로 처음 만나게 되는 인물이 이산인 건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정약용을 먼저 떠올리게 될 가능성도 큽니다. 그런데 그 시대를 한 개인의 인생에 고스란히 응집시킨 인물로 김홍도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김홍도가 뜨고 있다고 합니다. 조만간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김홍도가  뚜렷이 부각될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풍속화가로 씨름도, 서당도 등을 그렸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내 나이 마흔까지는 여섯 살배기 늦둥이가 알고 있는 요 정도에서 더 확장이 되지 않은 듯싶습니다. 김홍도가 드라마에 등장하기 이전에는 늦둥이와 내가 알고 있는 김홍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끄럽지만 말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바르게 개척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김홍도가 동성애자였다는 둥,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샤라쿠가 사실은 김홍도였다는 둥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센세이셔널 호사취미는 역사를 대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란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기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추적해 들어가면서 만나야 할 김홍도를 드라마 속의 동성애자로 만나는 건 사실 별로 건강하지 못한 취향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김홍도와 신윤복을 곰팡네 나는 박물관에서 깨워 불러낸 건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사실 왜곡이라고 훈계를 하곤 하는데 무덤 속 사실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실 추구가 호사취미 못지 않게 찌질하다는 걸 저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영화 [미인도]로 이어지며 김홍도 신윤복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18세기 조선의 국운을 좌우할 정조의 개혁 정책이 김홍도의 예술에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궁리하도록 이끌 실마리는 없었습니다. 신분사회에서 일개 환쟁이가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국정의 중추 역할을 해냈다는 건 사실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단원이 시대 사조의 핵심 코드를 일구어냈다는 평가도 있으니 이를 어찌 소화해야 할지 좀 난감합니다.

 

오주석은 김홍도의 작품 속에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추출해냅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왜 서구 유럽처럼 모던해지지 못했을까 속상해 하곤 했는데 그런 마음은 근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다 하게 된다고 봅니다. 일본의 소위 이식론에 자존심을 다친 조선 사람이면 예외 없이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러니 조선 근대화의 맹아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정시대에 가 닿고 정약용의 불행과 괴뇌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김홍도의 작품 세계를 해석하면서도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