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과 연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권신들의 권력 암투에 대해 몸서리칠 정도의 공포감으로 트라우마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살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매사에 신중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명대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것도 이런 공포감과 조심성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왕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정 권신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도록 줄타기를 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아버지 사도세자가 남인을 후원하다가 노론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노론에 맞서면서까지 소설(패관잡기)을 지지했던 아버지에 비해 정조는 어릴 때부터 소설을 읽으면 떨린다고 할 만큼 조심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박지원의 개혁 노선에 대해 지지하면서도 그의 소설 문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했던 정조의 입장은 어릴 적부터 형성된 공포감과 조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양반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문체에 대해 대대적인 검열에 들어간 정조의 문체반정이 그의 개혁 노선과 맞지 않는 것 같아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당시 기득권 세력은 노론 벽파였고 탕평을 하기 위해 신진개혁 세력을 중용했던 정조의 개혁 정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당시 유행했던 소설 문체는 기득권 양반 사회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 풍자했으니 그 비판을 곤혹스러워 하는 세력은 노론 벽파로 봐야 하고 비판을 주도한 세력은 신진 개혁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정조의 친위 세력이었던 규장각 젊은 학자들의 스승인 박지원이 나쁜 문체를 퍼트리는 주모자로 찍혔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소설 애호가 노론 권신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도세자와 친근했던 남인에 이 새로운 소설 문체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쉽게 추측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양반을 풍자하는 소설을 써서 기득권 세력을 불편하게 한 박지원은 노론 벽파 가문에 속에 있었습니다. 객관적 사실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겠지만 상식적인 추측과는 반대로 소설 문체가 널리 확산되어 비판을 받은 정파는 남인이 아니라 노론 벽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정조의 탕평책은 천주학쟁이로 몰리는 남인을 지원하기 위한 노론 벽파 공격용 담론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신진개혁 세력을 키우는 규장각의 학자들이 대부분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니 박지원을 제거하는 것은 신진개혁 세력의 지지를 잃을 위험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이 연암의 소설 문체를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끊는 말”이라며 맹렬하게 비판하며 문체반정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탕평과 개혁의 기반이었던 규장각의 신진세력들도 점차 분열되어 나가게 됩니다. 우려했던 대로 정조의 왕권 강화 개혁 정책은 좌절되고 맙니다.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정약용은 유배되고 박지원은 평생 외직으로 떠돕니다.
소설 [뿔뱀]은 1792년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해 4년 동안 임직에 있으면서 겪은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1783년에 [열하일기]를 쓰고 문명을 얻은 지 약 10년 뒤의 일입니다. 안의 현감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한성부 판관까지 지냈으니 중앙 부처의 요직에까지 오른 사람이 어떻게 가야산, 지리산, 덕유산이 만나는 궁벽한 골짜기로 좌천(?)되어 온 것인지 그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779년에 연암이 거두로 있는 북학파의 서얼 출신 학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규장각에 들어감으로써 연암은 일약 정조 친위 세력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열하일기]의 패관잡기(稗官雜記)가 구설수에 오른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암이 문체반정의 중심 타깃으로 부각되게 된 것입니다. 소설 [뿔뱀]은 연암이 궁벽한 시골에서 외직으로 있을 때를 그리고 있어서 그런지 문체반정의 내막을 선명하게 드러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 [뿔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암의 치적은 아무래도 지방 행정가로서의 보범적인 모습일 듯합니다. 안의 현감으로 내려오기 전에 북학파의 거두로서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시절은 참으로 많이 얘기되어 왔던 것이지만 지방 한직으로 내려가 있을 때의 그의 행적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저작물말고는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안의 현감 박지원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와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에 들어와 있는 선진 문물을 많이 소개했는데 그 중의 물레방아는 박지원이 연암 현감으로 내려갔을 때 처음 실용화했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역사적 고증이 좀더 필요하겠지만 경남 함양에서는 이 업적을 기려 용주계곡에 물레방아 공원을 조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연암은 안의에서 4년 동안 치수(治水)사업, 민생 사업, 물산장려 사업 등으로 민심을 얻고 민중과 유지들로부터 공히 선정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처음 취임했을 때에는 지방 토호세력의 모함과 훼방으로 어려웠지만 점차 그의 실용을 겸비한 진심이 계층을 상하를 불문하고 지방민 전체의 지지를 얻게 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연암의 여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자지간에 나눈 서찰을 통해 그의 집안 문제가 비교적 소상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사사로운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소설 [뿔뱀]은 정조가 외로운 연암을 위해 여인을 안의로 보내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일국의 왕이 나비첩이라는 형식으로 신하에게 여인을 보내는 게 있을 법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비첩’은 가문에서 쫓겨난 여인을 처음 발견한 남자가 취하는 풍속이라 하는데 행정관이 그런 여인을 데리고 사는 게 잘 납득이 안 됩니다. 친구가 방문했을 때 나이 어린 기생을 골라 잠자리 수발로 들여보낸 연암의 행적을 보았을 때 소설 [뿔뱀]이 그리고 있는 연암의 여성관은 실제 그러하였는지 좀 의심이 드는 점이었습니다.
■ 참고
KBS 방송 [학자의 고향] 37회 열하일기, 조선 개혁을 담아내다, 38회 백성을 위해 붓을 들다
OBS [선비의 길] 연암 박지원의 초탈
연암의 대표작 [양반전]은 양반이 허세만 부리고 탐학하여 백성을 괴롭히기만 하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판합니다. 그의 아들 박종채는 학문으로 관직을 사는 게 온당하지 못하다 하여 과거 시험을 비꼰 적이 있었고 그의 손자 박규수는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니 연암 집안의 삼 대에 걸친 기행은 참으로 놀랍다 할 것입니다. 연암은 실학 사상가들의 그룹 백탑파의 리더였고 그의 손자는 구한말 젊은 개혁가들의 스승이었던 백송대감입니다. 대를 이어 조선의 개혁을 꿈꾸고 실천한 그 집안의 전통은 본받아 마땅합니다.
EBS [역사채널 e] 열녀 만들기 프로젝트
충(忠), 효(孝)와 함께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축으로 작동했던 ‘열(烈)’에 대한 간략하게 고찰하고 있다. 연암의 [열녀함양박씨전]이 언급된다. 박지원은 안의 현감에 재직 중일 때 이 작품을 썼는데 열녀를 만들기 위해 여인을 희생시킨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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