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시

난훈(蘭訓)

체거봐라 2014. 8. 19. 14:53

난훈(蘭訓)

 

겨우내 애지중지 돌보아 왔는데

이제 훈풍을 맞아 새로 꽃대도 돋을 법한데

하필이면 움 돋고 싹트는 이 좋은 계절을 맞아

잎 끝이 타드는 너를 차마 두고볼 수가 없구나.

제 홀로 고귀하다지만 어찌 저리 괴벽하냐.

깎아지른 암벽에, 천년 고목에 뿌리 내려,

박무(薄霧)에 목 축인다는 너라지만

조석으로 들여다 본 성의를 어찌 이리 무람케 하는가.

 

새벽바람으로 나서는 집 앞 담벼락에

개나리는 흐드러졌는데

딱히 돌보는 이도 없을 석축을 어찌 저리 곱게 물들였느냐.

무성한 잡초마냥 지나친 날들이 무안해지는구나.

폭염에 갈마르고 눈서리를 견디어

비로소 만개하는 너를 다시 보는 이 봄.

어느 봄이 그러하지 않았으랴만

한결같이 새로운 건 무슨 일이냐.

 

보듬어안는다고 움트는 게 아니로구나.

속좁은 자의 성마른 처사가 너를 말렸구나.

북풍 한설마저 꽃눈을 위한 축복임을 나는 몰랐구나.

거리마다 분분한 꽃비를 맞으며 너를 생각한다.

너를 내 뜻대로 짓는 게 아니었구나.

너를 만나려면 너를 내 안으로 들이는 게 아니로구나.

참 아름다운 너를 만난다는 건

내가 너에게로 가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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