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훈(蘭訓)
겨우내 애지중지 돌보아 왔는데
이제 훈풍을 맞아 새로 꽃대도 돋을 법한데
하필이면 움 돋고 싹트는 이 좋은 계절을 맞아
잎 끝이 타드는 너를 차마 두고볼 수가 없구나.
제 홀로 고귀하다지만 어찌 저리 괴벽하냐.
깎아지른 암벽에, 천년 고목에 뿌리 내려,
박무(薄霧)에 목 축인다는 너라지만
조석으로 들여다 본 성의를 어찌 이리 무람케 하는가.
새벽바람으로 나서는 집 앞 담벼락에
개나리는 흐드러졌는데
딱히 돌보는 이도 없을 석축을 어찌 저리 곱게 물들였느냐.
무성한 잡초마냥 지나친 날들이 무안해지는구나.
폭염에 갈마르고 눈서리를 견디어
비로소 만개하는 너를 다시 보는 이 봄.
어느 봄이 그러하지 않았으랴만
한결같이 새로운 건 무슨 일이냐.
보듬어안는다고 움트는 게 아니로구나.
속좁은 자의 성마른 처사가 너를 말렸구나.
북풍 한설마저 꽃눈을 위한 축복임을 나는 몰랐구나.
거리마다 분분한 꽃비를 맞으며 너를 생각한다.
너를 내 뜻대로 짓는 게 아니었구나.
너를 만나려면 너를 내 안으로 들이는 게 아니로구나.
참 아름다운 너를 만난다는 건
내가 너에게로 가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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