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오늘은 114주년을 맞는 세계여성의 날이다. 1908년 뉴욕의 봉제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시위한 날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대한제국이 망하기 두 해 전인 구한말 시대에 미국에서는 여성노동자 수만 명이 가두시위를 했다는 게 참 놀랍다. 동양 사회는 성평등 의식이 뒤쳐지고 남성 중심 문화가 아직 만연하다는 인식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구한말 이 나라에도 위대한 여성 선각자가 많았다는 걸 알면 우리 조상들의 전근대 문화만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조국 독립을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이 우리 역사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듯이 이 투쟁을 이끈 여성 선각자의 일대기는 우리 민족의 선진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한다.
1919년 조선에서 벌어진 3.1만세 비폭력 저항운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운동이 ‘김마리아’라는 젊은 여성 선각자의 희생으로 비롯되었다는 건 잘 모르는 것 같다. 3.8 여성의 날을 맞아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여성 선각자들의 투쟁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으면 한다. 3.1만세운동이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조선독립 선언을 하면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서술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게 지적되고, 3.1운동은 만주에서 시작된 무오독립선언과 재일본 유학생이 일으킨 2.8독립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동경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문을 국내로 밀반입시킨 이가 '김마리아'라는 20대의 어린 처녀이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의 활동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상해 임정은 이광수를 일본으로 파견하고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추진한다. 일본 유학 중에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와 황에스더(황애덕)는 나혜석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와 3.1만세운동을 조직하게 된다. 이때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몰래 숨겨 들어오는 위험한 일을 맡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내내 한복만 입던 그녀는 기모노 차림으로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선언서 국내 유포에 성공하게 된다. 3.1만세 운동은 김마리아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KBS 3.1절 특집 [김마리아,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다] 김마리아 부산항 입국 장면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열다섯 살 때부터 서울 삼촌 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삼촌 집에 드나들었다. 이때 김마리아가 자주 만난 안창호, 김규식, 이동휘 등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게 되는 애국지사들이다. 김마리아는 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김규식은 김마리아의 고모부가 되었으니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애국지사의 가풍에 영향을 받아 민족혼이 깨어났을 것이다.
스물세 살 때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 동경 유학 때 1919년을 맞아 황애덕과 함께 2.8독립선언을 주도한다. 2.8독립선언은 신규식이 상해에서 설립한 신한청년당이 이광수를 일본으로 밀파하여 일으킨 사업이었다. 나중에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 이광수이지만 이때만 해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열혈 청년이었다. 그가 쓴 2.8독립선언서는 혈서라 할 만큼 단호한 선언이었다. 2.8독립선언서와 기미독립선언서를 같이 읽어 보면,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가 김구, 신채호 등 지사들을 격분케 한 이유를 알만 하다. 이때만 해도 열혈 독립투사였던 이광수가 쓴 선언서는 그야말로 혈서였다.
"일본이 만일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오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리라."
- '2.8독립선언서' 중에서 -
일본 유학 시절 김마리아
김마리아가 목숨을 걸고 숨겨 들여온 독립선언서는 조선을 깨워낸다.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세 여성은 투옥되고 심한 고문을 받는다. 특히 김마리아는 주모자로 찍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한쪽 젖무덤이 무너지고 음부는 인두질 당하는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몸이 다 망가져서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마리아는 정신여고 교장 사택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황에스더’ 등 여성 지도자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의기투합 하게 되고 결국 여러 여성 단체를 결집시켜 [애국부인회]를 결성한다. 처음 회장은 오현숙이 맡게 되었는데 그는 이리저리 몸을 사리면서 일이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회장이 일신의 안위만 생각한다고 성토한다.
“2.8독립선언 때에는 여성들도 수십 명 참여했는데 어찌하여 3.1독립선언서에는 여성 대표가 한 사람도 없는 겁니까. 이러니 조선의 여성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거 아니오. 나라가 망했는데 뭘 주저하고 뭘 가린단 말이요.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비록 죽더라도 무슨 한이 되겠소.”
김마리아 의기는 좌중을 압도했다. 전에 없던 열기로 여성 지도자들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 기운이 그대로 김마리아 회장 추대로 이어졌다. [애국부인회]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고난의 비극이 또 들이닥친다. 11월에 대구 조직이 탄로 나면서 지부장 ‘이금례’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하면서 김마리아 등 조직원들이 붙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정에 서게 된다.
“네가 모임을 조직한 것이 대정(大正, 일본 연호) 몇 년이냐?
김마리아는 얼굴에 냉소를 띄며 답했다.
“나는 서양력만 알지 일본 연호는 모른다.”
질문한 검사는 눈을 부릅뜨고 재판관들도 얼굴이 굳는다.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운동을 하는 게 뭐가 잘못인가?
김마리아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가석방으로 풀려나고 일경의 감시를 뚫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녀가 탈출하도록 도와준 이가 인천의 독립투사 ‘윤응념’이다. 윤응념은 상해 임정에서 파견한 요원으로 인천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헌납을 조직하고 상해와 본국을 몰래 오가며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는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 직을 맡고 있었다. 윤응념의 도움으로 상해로 건너간 김마리아는 평생 조국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윤응념의 일대기를 작성하면서 위대한 여성 투사 김마리아를 알게 되고 그녀와 함께 조선 독립 운동에 이바지 하며 봉건 유습이 온존하는 조선에 페미니즘의 씨앗을 뿌린 ‘황애스더’, ‘나혜석’을 만나게 된 게 필자에게는 큰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약자의 권리에 대해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걸핏하면 사회 개혁 운운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약자의 아픔에 대해 귀 기울였는가?” 내 관념을 반성하며 새로 태어날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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