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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유해가 어떻게 그렇게 먼곳에서?

체거봐라 2021. 8. 14. 11:34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5일 광복절 날 조국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은 다들 잘 알고 있었는데 이 두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재작년에 발표되어 주목을 받았던 영화 [봉오동 전투]로 좀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 시대 통한(痛恨)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들 모릅니다. 독립전쟁 영웅인 분이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100년 만에 유해로 조국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참 비통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있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덮어버리고 모르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3.1만세운동 바로 다음 해에 일본군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전과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한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으며 그가 몸 담았던 북로군정서의 지도자 서일 총재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어찌 하여 잊히고 말았는지 차근차근 되짚어 봐야 하겠습니다.

 

카자흐스탄 홍범도 묘지 (역사저널 그날 -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홍범도)

 

192010월 청산리대첩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닙니다. 4개월 전에는 봉오동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본군 157명이 죽고 2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비해 홍범도의 독립군은 전사 4, 부상 2명에 그쳤다고 합니다. ‘신출귀몰 날으는 장군이라고 불리며 살아있는 전설의 인물이 된 홍범도 장군은 1895년 을미의병 때부터 함경도 지방에서 산포수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정미의병 때부터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37회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가히 국내 의병 항쟁의 구심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군이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2만 명(6000 명 청산리 전투 투입)의 병력을 동원한 걸 보면 함경도지역과 간도지역의 의병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청산리대첩은 4반세기에 걸친 끈질긴 의병 항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 죽음의 계곡 장면

 

영화 [봉오동 전투]19206월에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로 유인하여 전멸시키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배우 유해진은 유명한 독립군 '황해철'을 연기하는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실존인물이라고 합니다. 봉오동 골짜기는 3면이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라 유인섬멸 작전을 펼치기에 아주 적합했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황해철 부대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우스꽝스러운 대사가 자주 나와 독립 투쟁 역사를 다룬 영화의 격이 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유명 인물 중심이 아니라 무명용사로 죽어간 민중을 중심으로 그려냈다는 점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2010KBS에서 방송한 청산리 독립전쟁 승전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은 민중의 독립투쟁 헌신을 잘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한 마을에서 자란 두 친구가 독립 투쟁에 몸 바치기 위해 간도로 떠났다가 헤어져서 각각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로 들어가 활동하다가 청산리전투에서 상봉하여 함께 싸우는 이야기는 참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몇몇 걸출한 영웅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이름 없이 산화해간 민중에 의해 진일보한다는 것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었습니다. 적군마저도 그 전략과 용기를 칭송했다고 하는 홍범도 장군은 노비 출신에다 사냥꾼이라는 천민 신분으로 조국 독립에 투신했으며 독립군 부대를 꾸리면서 주둔지 주변 민가에 어떤 민폐도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교 제복을 입지 않고 장수와 군졸의 구분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분으로 어딜 가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청산리 전투하면 김좌진 장군만을 거의 반사적으로 연상하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 교육에서 기인했다고 봅니다. 김좌진 장군의 군대는 이회영에 의해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무관들에 의해 정규 군대로 편성될 수 있었으며 장군이 속한 항일의용군 부대 북로군정서는 일찍이 조선 민중들이 만주로 건너와 자리잡아 일군 용정, 연길 일대 한인촌의 후원에 힘입어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산리전투를 다룬 대부분의 팩션(사극)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입체적으로 그리지 못하고 다만 김좌진 장군을 영웅으로 미화하기에만 급급합니다.

 

독립투쟁의 위대한 민족사가 왜 이렇게 왜곡되고 말았을까요. 함경도 지방, 간도,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사를 하면 할수록 분열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은 이데올로기의 폐해가 주원인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일례로 청산리 전투를 다룬 라디오 드라마가 1960년대에 방송된 적이 있었는데 이 방송을 들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황당한 날조극이라고 비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중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실체험자가 많았거든요.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역사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식마저 뒤틀리게 만들었다니 참 황망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근래 연변 조선인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발굴한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토대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실상이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수하에 있었던 이범석의 증언(회고록 우등불’)에만 기대어 우리가 청산리 전투에 대해 잘못 알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 역사 연구를 이끈 연변대학교 박창욱 교수는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담당한 국가 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자는 김좌진이 아니라 홍범도였으며 청산리 전투의 마지막 격전장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군정서는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고 홍범도 장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김좌진 장군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러시아로 넘어가서도 찬밥 신세가 되고 맙니다. 소비에트 공산군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독립군 부대는 볼셰비키 공산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가 죽거나 포로가 되고 살아남는 자들을 다시 북간도로 넘어오지만 결국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는 통한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고 김좌진 장군은 간도 조선인 민중의 미움을 사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말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장군은 볼셰비키 공산당에 입당하여 조선 독립군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지만 자유시 참변을 막지 못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레닌 사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합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조선 최고의 혁명 전사로 떠받들어졌던 명예는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수위로 노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