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길은 한일병합(1910) 한 해 뒤에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지만 3.1만세운동(1919) 직후에 집이 간도 용정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아버지가 만세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수길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지사(志士)적 풍모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세운동 주도자로 일경의 감시를 받은 분으로 간도 용정으로 옮긴 뒤에는 광명고등여학교 교감과 동아일보 용정 지국장을 지냈으니 그분은 우국 지사로 두루 존경을 받은 분이었다. 어린 시절을 간도 용정에서 보낸 것도 안수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30년대 용정
간도 용정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와 접경지역으로 주민의 입주를 금지해서 텅빈 섬과 같다 하여 간도(間島)라 불리기도 했고 구한말 때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들어가 개간해서 간도(墾島)라 불렀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침탈되면서 많은 지사(志士)들이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독립운동 기초를 닦았다. 이상설 선생이 용정에 세운 ‘서전서숙’은 간도 용정의 대표적인 교육 시설이다. 이상설 지사가 헤이그 밀사로 떠난 뒤에 여러 서당이 통합되어 명동학교로 성장하고 북간도 민족 교육의 중심이 된다. 명동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아는 윤동주 시인이 다닌 학교이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병사들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인 만큼 이 학교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우리 민족정기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용정 비암산 일송정
윤동주, 문익환 선생이 공부한 명동학교가 있었던 북간도 용정은 우리 전통 문화 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누구나 알고 있는 가곡 ‘선구자’가 탄생한 곳이 바로 용정이다. 용정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윤동주는 열여덟 살 때 <삶과 죽음>을 썼다고 하는데 작품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 끝나랴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고조선 고구려로 이어진 우리 민족 정기가 서려있는 곳 간도의 중심지 용정의 기운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1930년대 시가지를 보면 많은 한국인이 자리잡아 살면서 꽤나 번화해진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연변 조선족이 남한으로 많이 들어와 많이 친근해졌고 연변 용정으로 여행 가면 흔히 찾는 일송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해란강과 연변 일대가 꼭 국내인 것처럼 친근하다. 역사적으로 실제 이곳은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다.
간도와 만주 일대는 고조선, 고구려 건국의 역사가 깃든 곳이라 우리 민족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싹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경술국치(한일합병 1910) 직후 서간도에는 이회영 선생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졌고 여기에서 전사(戰士)들이 대거 양성되었다. 간도 일대에는 한일합병 이후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 경작권을 약탈당한 농민들이 대거 이주해 들어왔고 합병 이전에 들어온 독립투사들이 중심이 되어 자치단체를 꾸려 나갔다. 명동촌은 그 중 하나로 무장 독립투쟁의 배후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어랑촌은 이곳에서 멀지 않다. 이렇듯 근처 산악지대는 항일 유격 근거지로 조선인 소비에트(해방구)가 건설되기도 한 조선 독립운동의 심장이었다. 또한 이곳은 민생단 사건으로 독립투쟁 근거지 대부분이 붕괴되고 마는 처참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명동촌에서 멀지 않은 청산리에서 2만 5천 규모의 일본군 토벌대를 격퇴한 김좌진, 홍범도 독립군의 규모가 약 3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곳을 근거지로 주둔한 조선독립군은 일제의 대륙 침략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장 세력이었다. 청산리 전투(1920)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일제는 간도지역의 조선 민간인을 참혹하게 학살한다. 이 비참한 사건을 경신대참변이라고 하는데 이때 무고하게 죽어간 조선인이 3만에 달했다고 한다. 잔악한 일본군들이 갓난아기를 허공으로 던져 서로 총검으로 찌르며 시시덕거렸다는 증언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악귀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런 영광스러우면서 끔찍한 우리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 바로 간도 연변이다.
안수길은 3.1만세운동 직후 아버지를 따라 간도 용정에 왔고 중앙학교를 다니며 10대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모여들던 용정 지역의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또한 안수길에게 큰 가르침을 준 분이다. 부친 안용호는 용정의 광명고녀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아일보 용정지국장을 맡은 애국 지사(志士)였다. 간도 용정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안수길은 열여덟 살 때 서울로 상경하여 경신학교에 편입했고 다음 해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이 터졌을 때 학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고 학교에서는 제적되고 만다. 일 년 뒤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을 다니다가 늑막염을 앓는 등 건강이 안 좋아 1년만에 유학을 포기하고 용정으로 돌아온다. 용정에서 자리를 잡아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이때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소설가 염상섭과 같이 활동했다.
노년의 안수길 ⓒ 시공사
해방 후 가족과 함께 고향 함흥으로 돌아왔다가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한으로 내려와 정착한다. 경향신문에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의 대표작 ‘북간도’가 이때 발표된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건강이 많이 나빠졌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는 끔찍한 일도 겪는다. 몸이 안 좋은 상태인데도 글을 쓰고 후학도 길러내는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어느 쪽으로도 경도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의 고뇌가 아니었을까. 국경지대 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해방이 되고 고향 함흥이 공산 치하가 되면서 남한으로 내려왔고 동족상잔 비극의 틈바구니에서 ‘제3인간’으로 연명했으니 그는 분단의 우리 역사를 온몸으로 겪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 비극을 형상화한 문학 작품의 전형을 일구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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