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학교에서 원고를 부탁해와 쓴 글입니다.
빨리병 대충병
이호연 아빠 이한수
안녕, 나는 호연이 아빠야.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중고등학교 선생님과 초등학교 선생님은 많이 달라.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면 교육대학이란 델 나와야 하고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려면 사범대학을 나와야 해. 나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만 가르치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은 만능이야. 뭐든 다 할 줄 아시잖아. 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 초등학교 선생님은 재미난 얘기도 들려줄 수 있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도 멋있게 부를 수 있고, 물구나무도 설 수 있어야 하잖아. 그래야 애들이 선생님을 본받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테니까 말이지. 그러니 선생님이 되는 건 참 힘든 일임이 분명해. 나는 말고 너희 담임선생님 같은 초등학교 선생님 말야.
내가 너희 선생님처럼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 눈높이가 잘 안 맞을 거 같아. 나는 맨날 고등학생들 앞에서 말을 하거든. 너희들은 내 얘기를 재미없어 할 게 분명해. 고민이 많이 돼.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줘야 하는데 걱정이다. 너희들이 시험공부를 하는 것만큼 힘이 든다고 보면 될 거야. 시험이 연기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처럼. 하루만 미뤄주시면 안 될까요 떼를 쓰고 싶어. 무슨 일이든 다 그런 거 같아. 뭐든 제대로 되려면 힘든 걸 참고 견디어내야 하잖아. 참 맞는 거 같아. 뭐든 진짜 재미있어지려면 지겨운 연습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 요즘 사람들은 참고 견디는 걸 잘 못하는 것 같아. 다들 빨리빨리 대충대충병에 걸려 있는 것 같거든. 이건 참 문제야.
너희들 닭튀김이랑 햄소시지 좋아하지? 나도 좋아해. 어릴 때 우리 집이 가난해서 닭튀김 같은 건 좀처럼 먹기 어려운 비싼 음식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든 지금도 닭튀김이랑 햄소시지는 귀한 음식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너희들 닭튀김 햄소시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면 그 음식이 전처럼 그렇게 맛있지만은 않을걸. 너희도 한 번쯤을 양계장 양돈장을 가보면 좋을 거 같아. 구경시키기 위해 잘 청소한 곳 말고 평소 그대로의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날 게 뻔해. 너무 끔찍해서 무섭기까지 할지도 몰라. 닭은 움직이지 못 하도록 작은 상자에 가둬서 키우고 밤새도록 불을 환하게 밝혀 잠을 못 자게 해. 그래야 살이 많이 찌고 달걀을 많이 낳거든. 생각을 해봐. 너희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자에 갇혀서 잠도 못 자고 밤낮 먹기만 한다면 어떨까? 으, 상상도 하기 싫지? 아마 미쳐버리고 말거야. 난 그렇게 자란 닭들이 대부분 미쳐있을 거라고 봐. 그러니 자기 몸의 털을 뽑고 그러지. 얘들아 우리가 맛있게 먹는 닭튀김 닭은 그렇게 길러진단다. 우린 너무나 고통스러워 미쳐버린 닭을 먹는 거야. 햄소시지도 마찬가지.
우리는 패스트푸드를 너무 좋아해. 그런 음식들은 다 끔찍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지 않을 게 분명해. 패스트푸드라는 말은 ‘빨리 먹어치우는 음식’이란 뜻이잖아. 빨리 빨리 되는 건 없어. 너무 빨리빨리 하다가는 대충대충병에 걸려서 진짜 재미있는 건 하나도 못 하게 될 거야.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빨리빨리 대충대충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재미는 진짜 재미가 아니야. 진짜 재미있는 걸 그렇게 쉽게 얻을 수는 없는 법이거든. 아빠가 앞뜰에서 기른 채소를 엄마가 알뜰살뜰 만든 음식을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는 재미가 진짜 재미야. 아빠가 손수 기른 채소이니 엄마는 애지중지 맛나게 만들 게 분명하고 그런 음식은 우리를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게 분명하잖아. 이제부터는 뭐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살펴보도록 해봐. 사실 공부라는 건 그런 거거든. 내가 좋아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 밥을 먹으면서 벼가 자라는 들판을 떠올리고 농부의 땀방울을 생각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진짜 자유롭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거야. 그런 사람은 쌀 한 톨도 함부로 하지 않을 거야.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너희들처럼 말야.
누에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는 걸 보고 있으면 참 답답해. 무지 힘들어 하는 것 같거든. 시간도 많이 걸리고. 누구든 그 모습을 보면 도와주고 싶을 거야. 구멍을 좀 뚫어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대. 온 몸을 뒤틀면서 힘들게 힘들게 고치를 제 힘으로 뚫고 나온 나방은 곧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구멍을 내주어 쉽게 나온 나방은 절대로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한대. 고치를 쉽게 빠져나오는 건 진짜 재미가 아니야.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게 진짜 재미잖아. 세상 일이 다 그래. 너무 쉽게 빨리 얻으려고 하면 진짜 재미를 절대로 맛볼 수가 없을 거야.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참고 견디는 노력이 결국 나를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진짜 재미를 맛보게 해 줄 거야. 땀 흘리지 않는 보람이란 없어. 먹는 것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다 그래. 그렇지? 그런 거 같지? 내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조동 친구들 반가워. 나도 너희 선생님처럼 만능이면 참 좋겠다. 난 솔직히 피아노도 못 치고 물구나무도 못 서.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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