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해리스'에 비해 '모리스'는 더 '구달(침펜치 연구가)'에 가깝다. 북친('휴머니즘의 옹호' 저자)은 생태학적 관점이 어떻게 인간계를 초월하는지 들추어냈는데, 정보의 조합과 구조화가 아이디얼화하면서 현상을 왜곡하는 경향성을 갖는다는 해체적 발상 이후 이런 류의 책읽기는 일종의 사유의 변비증을 불러일으킨다. 근대 논리학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하지만 반지성의 몽환적 사유가 횡행하는 시대에 기껏 가능한 담론 패턴이라고는 아포리즘 뿐이란 말인가. 사태를 개념화하면서 아찔한 반중력(일종의 추상 현기증)을 느낀 이들은 모두 지성의 원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린 너무 쉽게 교조주의에서 빠져나왔지 않은가. 사유와 물자체의 간극은 관절처럼 인간 이성의 골격을 잇기도 하지만 심각한 관절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급조된 고층 건물처럼 현대 논리사유체계는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추상관절(사유와 물자체의 간극)은 더이상의 하중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통증을 앓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아포리즘은 골격구조와 관절 역학에 대해 궁리하기보다 논리사유체계의 파괴를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폐허 위에 에코환타즘을 건설할 요량인가 보다.
구달은 동물에게서 인간을 보고 모리스는 인간에게서 동물을 본다. 둘다 동물학자이지만 구달은 동물에게서 인간적 엘레강스를 보고 모리스는 인간에게서 동물적 페이소스를 보는 것이다. 이들처럼 동물학자 중 상당수는 인간과 동물의 질적 차별성을 확립시켜온 기존 이론 또는 신념체계에 일종의 냉소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오만한 발상에 기인한 근대 인격이론이 작금의 불행한 환경 파괴를 가져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동물과 인간이 호혜 공존하는 가이아의 대지 위에 만물의 공생적 순환시스템을 건설하는 것이 소위 동물 애호가, 생태주의자의 아이디얼인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모리스와 구달의 언설은 이론체계와 단속된 아포리즘에 불과해 보인다. 인간계의 논리사유체계를 비인간계의 현상(일종의 이미지)으로 비유하려고 하는 일종의 유비추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거대담론에 대한 알르레기적 반응의 일종으로 전면적 사유에 대한 불철저성을 문학적 장치로 얼버무리는 기만이거나 일종의 착오상태임이 분명하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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