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성공회대학교) 밖에서는 강의를 좀체로 하시지 않는데, 인천사회포럼 자리에 신영복 교수님을 모실 수 있어서 참 영광이었습니다. 귀한 강연이라 전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몇 자 적습니다. 관절염을 앓고 계시기도 하고 끝없는 자기 혁신을 위해 떠벌이는 것을 자제하시려는 뜻을 알고 있어서 피하시는 마음 거스를 수가 없었는데 노동대학 졸업생의 부탁은 거절하시기 않으셨습니다. 귀한 강연을 들은 인천 시민은 섭외하신 송준호 시민연대 통일위원장 님 덕을 본 셈입니다. "AS 차원으로 가마" 우스게 소리를 하셨답니다.
한 시간 반동안 말씀을 하셨는데 전하시려는 메세지는 시민운동이 어려워진 건 정권 탓도 아니고 세계경제가 어려워 그런 것도 아니고 바로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의 양심 때문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일화를 들려 주셨는데 그 중에 가슴을 찌르는 몇 가지를 전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출옥하셔서 옛날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 사는 형편을 들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답니다. 빼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이목이 집중되었던 출중한 활동가들은 성공해서 권력자의 반열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어있었고 말주변도 없어 보이고 있는듯 없는듯 보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한 사람들이 고달픈 사회운동을 여태 지키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무슨 큰 뜻이 있어서 사회운동을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선후배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궂은 일을 맡아온 사람들이랍니다. 뜻이나 명분이 그들을 움직인 게 아니고 그냥 양심, 선량한 마음 때문에 그 자리를 그냥 지키고 있었던 것이랍니다. 이런 얘기를 들려 주시면서 '양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젊은이 얘기도 참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옥소에서 온갖 인간 쓰레기(교수님깨서는 이런 말을 쓰시지 않았습니다)라 할 수 있는 잡범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고 처음에는 자신은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고 그들은 관찰의 대상일 뿐이었답니다. 그들 중의 하나인, '대의'라는 이름을 쓰는 젊은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大義, 이름이 참 멋있어서 궁금했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주신 어른이라면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누가 이름을 지어줬냐고 물어 봤답니다. 젊은 수인은 버럭 화를 내고 대답을 해주지 않더랍니다. 참 별놈이다 싶었는데 나중에야 '대의'가 광주에 있는 동 이름이고 젊은는 돌이 갖 지난 아기 때 광주시 대의동파출소에 버려졌답니다. 그래서 이름이 大義가 되었답니다. 하! 기가 찰 노릇이지요. 선생님은 엄청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소위 운동을 한답시고 무슨 이론이니 주의니 잔뜩 주워섬기는 지식인이 사회 인식이라는 것이 정말 가소롭기 그지 없다는 부끄러움으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다 '거품'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다른 일화도 많이 들려 주셨습니다. 교수님의 강연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온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화를 들려 주시면서 碩果不食, 和而不同, 두 경구를 남기셨습니다. 해석하면 '씨열매는 먹지 않는다',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의 지혜를 배우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석과불식은 거품을 걷어내고 알맹이까지 까먹지 말라는 주관적 태도에 대한 경구였습니다. 화이부동은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인류 문명사적 비극의 시대에 대안은 다원주의적 공존의 문명일 수밖에 없다는 객관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담은 경구였습니다. 나무가 잎사귀를 떨구고 근본을 드러내며 떨군 잎사귀는 거름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합자연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품은 명예니 재물이니 권세니 하는 온갖 욕망 덩어리겠지요. 이런 거품을 다 걷어내고 마지막 남는 씨열매인 양심을 잘 보존하자 그래서 떨어버린 거품이 거름이 되어 근본을 튼튼히 하면 나중에 싹 틔울 수 있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和而不同, 저는 이 경구를 좋아합니다. 군자는 독특하지만 남과 잘 어울린다는 의미로 늘 새기로 살았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셨습니다. 군자론으로 해석하는 버릇은 조선 유학자들이 역사적 정황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수양학으로 공맹 사상을 변질시킨 결과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저는 늘 忠恕를 행위 규범으로 내면화시켜 거든요. 중심은 흔들리면 안 된다. 그렇지만 중뿔나서 이웃과 섞이지 않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늘 해 왔거든요. 화이부동은 이런 충서의 행위 규범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화이부동이 춘추전국시대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대안이었다고 봅니다. 50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무력으로 패권 다툼을 벌여 끝내 천하가 통일되어 나가는 무자비한 시대에 지식인들은 同을 부정하고 和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랍니다. 同의 세계관을 지금 방식으로 말하면 '세계화'가 되겠지요. 세계화가 대세요 지향점이란 생각이 파다한데 '세계화'는 인류가 수차례 겪어왔던 제국주의 패권주의를 묘하게 꾸민 말에 불과하지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동일화를 가속시킵니다. 교육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를 모든 영역에 관철시켜나가는 것이 오늘의 패권주의입니다. 겉모양은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중국 고대 제국 형성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이부동은 여전히 인류 문명사의 대안적 경구로서 유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김종철 교수님의 동아시아의 '소농'이 인류 문명의 대안이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종국에는 한 방향을 겨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영복, 김종철, 두 분의 말씀은 수천 년 전부터 욕망의 세계를 걱정한 현자들이 해 왔던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국과민'도 같은 의미랄 수 있잖아요. 작은 경작지를 일구고, 거두어들인 곡식을 먹고, 배설한 분변을 다시 땅에게 돌려주고, 땅은 소진되지 않으면서 다시 곡식을 키우는 자연의 순환 매커니즘이 인간의 탐욕 때문에 다 망가져버렸어요. 김종철 교수님 말씀처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황폐화시킨 가장 끝 이유는 관계농업으로 인한 땅의 사막화였던 것처럼 땅이 죽으면 문명은 쇄락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역사 속에서 거듭 확인하면서도 인간의 욕망은 자멸을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지금 너무 풍요롭지 않은가 반성해 봅니다. 누군가 그랬어요. 우린 진짜 필요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과시하기 위해 힘들여 구하고 있다고요. 헛된 욕심만 버리면 진짜 필요한 것이 그리 많지 않고 이런 것을 얻기 위해서는 쾌적한 적은 노동만으로도 족하다는 겁니다. 멀리 나갈 필요도 없고, 적당히 일구어 얻고 먹으며 소박하게 살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도시의 생활이 죽기보다 싫어지는 날이 오겠지요. 신영복 교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하면서 속으로 다시 새겨봅니다. 교수님께 허락을 받으면 영상자료로 만든 교수님의 시화집을 여러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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