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스토리텔링

파자(破字) 개념론 - 기(氣)와 정서

체거봐라 2009. 5. 26. 17:14

희노애락애오욕, 일곱 가지 정서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다 보니 이런 저런 감정의 차이를 말하게 된 것일 뿐,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일곱 가지만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분화될 수 있고 그렇게 분화시켜 나가는 것이 예술활동의 목적이라고 봅니다. 감성의 분화를 이해하기 위해 추상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설명을 하자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儒者(유학자)들은 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구분했을까요? 사단칠정론이 굉장히 난해한 철학 이론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다중지능 이론은 인간의 능력을 여덟 가지 정도로 나눈다고 소개했는데 인간의 마음이 갖는 능력을 知情意, 즉 지성, 감성, 의지 셋으로 나눈 방식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정신분석학자 플로이트가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로 삼분한 것도 마찬가지로 별반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영성(靈性), 덕성(德性) 같은 마음이 추가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유학자들이 말한 사단(四端)이 지성(知性) 또는 초자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칠정(七情)은 감성(感性) 또는 원초아와 다르지 않은 것이지요.

 

조선 후기에 감성과 이성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화시켜 보면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의 논리적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한 면과 악한 면이 공존하는데 이 둘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기도 하고 의존하기도 하니 그 둘의 관계를 논하는 의견들도 두 경향으로 맞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뇌의 역할이 점점 많아지고 사회를 형성하면서 언어가 발달하니 개체 보존(생물 개체의 생명 보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 충족만으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되면서 욕망도 점점 다양해졌다고 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개체의 욕구와 사회 집단의 요구가 충돌을 일으키게 될 수밖에 없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기적 욕망과 이타적 양보가 서로 대립하면서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타적 양보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순조롭게 형성하려는 욕구는 개체 보존을 위한 이기적 욕구보다 복잡한 정서적 반응 패턴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생리적 욕구를 거역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특이한 감정 반응 패턴이 있습니다. 이런 감정 반응 패턴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반드시 습득해야만 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면서 쾌감을 주는 자극과 불쾌감을 주는 자극이 변화합니다. 어리석을 때에는 선망하던 것이 나중에 철이 들고 나서는 오히려 혐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덜 진화했을 때 갖고 있는 감정 반응 패턴이 사라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본능적 욕구에서 시작하여 고차원적 자아실현 욕구로 단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차원의 욕구가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양태의 긴장관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본능적 욕구는 추한 것이니 사회화를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감정 패턴을 익혀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인간의 내면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익힌 감정 반응 패턴은 본능적 욕망에 부단히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합니다. 역으로 변화된 본능적 욕망이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살다보면 입맛이 변할 수 있고 입맛이 변하면 인간 관계도 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조선 후기에는 이기 논쟁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기(氣)는 气(수증기)와 米(쌀)이 결합한 글자로 밥을 지을 때 나오는 증기를 의미했던 글자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氣'를 에너지로 이해해서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은 현대 핵물리학과 양자역학의 기본 아이디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형태를 가진 물질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서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는 낯선 생각이 아닙니다. 이기철학에서 '氣'는 기분(氣分)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氣'를 나눈(分) 것이 바로 '희노애락애오욕'이라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 반응을 그 패턴에 따라 나눈 것이 바로 기분인 것입니다. 이 '氣'와 대립되는 개념이 '理(이치 리)'입니다. 理는 구슬(玉)과 마을(里)이 결합한 글자입니다. 마을(里)은 밭(田)에 길을 놓은 모습을 본뜬 글자입니다. 그러니 理는 옥의 결처럼 마을에 길을 놓는 것입니다. 이는 잘 이루어진 사회구성체를 의미한다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정리하면 '氣'는 욕망의 충족 결핍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 반응 패턴, 즉 기분이고 '理'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마땅히 필요한 도리(道理)라고 보면 아주 적절할 듯합니다. 이기 논쟁은 바로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유학자들의 생각들이 펼쳐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