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씨네마

부자(아버지와 아들) 관계, 부정, 오디푸스 컴플렉스 [아버지의 이름으로]

체거봐라 2011. 5. 5. 11:29

 

아비와 아들 사이의 비극은 역사 속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고 설화로도 이어져 내려올 만큼 흔하고 일반적이다. 그만큼 부자지간의 갈등은 성장기 삶을 지배하는 원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오이디푸스 설화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하는 스토리를 뼈대로 한다. 어미를 취한 대목에 주목하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인간의 욕망을 해석하는 주요 개념으로 확장해서 쓰는데, 여기에서는 아비를 죽이는 대목에 주목하여 좀더 보편적인 인간 관계의 원리로 이해했으면 한다.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아비를 넘어서려는 자식과 자식의 도전을 용납할 수 없는 아비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반목과 갈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아비와 자식의 갈등 이야기는 무수히 많지만 영조대왕과 사도세자, 간디와 그의 아들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는 아비가 아들을 죽게 만든다는 점에서 갈등 양상이 단조롭고 편향적이다. 오이디푸스 설화는 자식이 아비를 죽여 미래의 주역으로 서게 함으로써 구시대의 혁파와 미래로의 진보를 말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앞의 두 이야기는 퇴행적인 면모를 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가끔 위대한 존재가 등장하여 더 이상의 진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구세주의 부활 설화나 간디 부자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성인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위대한 영웅에게는 아들이라는 존재가 필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아들은 철저하게 무시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인도의 아버지 간디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걸 누가 알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오이디푸스 설화의 변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북아일랜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적 당위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아주 설득력 있게 말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고 그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설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계승한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 작품은 앞에서 예로 든 작품과 달리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으며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아주 형편없는 건달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런 점만으로도 이 작품의 위대성을 증명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아비의 죽음이 단순하지 않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단순히 아버지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비가 죽음으로써 아비의 정신은 아들에 의해 계승되고 아비가 죽음으로써 아들은 자신을 죽이고 아비의 화신으로 되살아 난다. 이런 점이 이 작품을 더 위대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세상 일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으면서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죽인 오이디푸스와 아들을 죽인 예수 설화가 절묘하게 합쳐진 위대한 원전(原典) 계승이면서 대영제국의 식민지 지배로 피폐해진 북아일랜드 역사 현장의 성실한 체록인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위대한 고전 작품 대접을 하여 모실 필요는 없다. 이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골치거리인 자식의 반란과 아비의 권위의식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드라마로서도 가치 있다고 본다. 그냥 골치 아픈 망나니 아들을 둔 아비의 속 터지는 이야기로 봐도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속터지는 사연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거듭거듭 반추된 정신사적으로 위대한 고민임을 확인케 만든다.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우리들의 유치한 인생이 실은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 예수 그리스도, 민족의 영웅 간디보다 더 위대하며 진실하다는 것을 이토록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