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공감이 정서 발달에 좋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본다. 더불어 살며 평화롭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공감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너와 나의 다른 점을 부각시켜 분리하려고 하지 말고 닮은 점을 찾아 통합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화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석적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통해 발전한 과학이 인간의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는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낱낱이 분석하여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냉철한 비판을 통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이 우리 사회를 합리적으로 발전하도록 한다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설화는 감동과 공감만으로 삶의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을 아주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는 우화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수많은 쥐때를 이끌어 스스로 시궁창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는데 그냥 애들 동화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의미심장한 면이 있는 이야기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설파했듯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들은 자기 민족의 영광을 되찾자는 독재자의 선동에 현혹되어 스스로 비판 정신을 저당잡히지 않았던가. 우리는 군중에 휩쓸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그러니 나를 무리로부터 분리해 내어 사태를 비판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화합(和合)만이 능사가 아니다.
나를 무리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소외시킨다고 한다. 속된 말로 나를 따돌림시킨다는 의미이다. 흔히들 따돌림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그렇게 할수록 대자적 존재, 인간으로 성장할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인데 인간(人間)이라는 말 속에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왜 '사이(間)'라는 의미가 왜 들어있는지 알아야 한다. 인간은 저 혼자만으로 존재(唯我獨存)할 수 없다. 자신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모든 '나다운 것'들이 사실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걸 부인할 수가 있겠는가. 남들과 달라 보이려고 이런 저런 장식을 한다고 그게 나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장식이란 것도 실상은 누군가 계획적으로 퍼트린 유행의 산물이니 말이다. 그러니 '나'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나를 내세우기 위해 버둥거릴수록 나는 무화(無化)되고 만다.
자신을 객관화시킨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소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 내면의 소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라깡의 '거울 단계'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아기 때에는 거울 속에 반영된 이미지와 실재(實在)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기가 엄마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단계를 라깡은 '거울 단계'로 개념화 했다. 아기가 이 단계를 벗어나면서 일종의 자기소외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소외를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고 봐야 한다. 이 과정을 잘 습득한 아이는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게 되고 대자적 존재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나르시시즘(자기애적 편집) 상태에 빠지거나 대인기피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필연적으로 자기 분열을 경험해야 이를 통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깡의 이론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무척 어렵다. 너무 전문적인 분야이고 공부가 모자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지만 나름대로 이해한 것은 이러하다. 라깡은 자아 형성 단계를 '거울 단계', '줄 당기기 단계', '오이디푸스 단계'로 삼분했는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유아적(唯我的) 존재에서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쉽게 말해 자기만 아는 아기가 성장하면서 남들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된다는 뜻이다.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과 실재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듯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질 못한다. 이 때를 '상상계'라고 하는데 상상한 것과 실재가 동일하다고 믿는 단계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 단계의 아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인식한 것과 다른 남의 인식을 전혀 수용할 수가 없어 타자의 이런 시선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 단계를 '나르시스 단계'라고 명명해도 될 듯하다. 엄마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는 단계로 이해할 수도 있다.
두 번째 단계 '줄 당기기' 단계는 자기 소외가 발생하고 난 뒤의 단계라고 본다. 엄마와 자신의 분리를 불안하게 체험하는 단계이자 상상계가 붕괴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자기 소외는 그 동안 확신했던 자신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걸 발견하면서 겪게 되는 자기분열이라고 보면 된다. 그냥 쉽게 세상에는 많은 거울이 있으며 내 모습이 다르게 비치는 거울을 처음 발견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이 때부터 그 동안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비춰왔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고 세상 일이란 게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인식될 수 있음을 깨닫는 '상징계'로 나아가게 된다. '줄 당기기'는 일종의 은유로 줄 끝은 엄마와 연결되어 있어 언제든 당기면 엄마와 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언젠가 줄이 끊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함께 하는 단계이다. 이 때 분리 불안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나르시시즘 상태를 벗어나기 못하고 고립된다고 보면 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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