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평생이 걸렸다”
- 마크스 보그 [기독교의 심장]에 대하여 -
저자는 기독교 신앙인들 사이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분하여 개념을 명확히 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두 관점 간의 이해와 조화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의 패러다임을 거칠게 개념화 하면 ‘문자주의’로 부를 수 있습니다. 문자주의는 성서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로 ‘동의’하는 관점을 말합니다. 이런 문자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대중으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기독교를 대상으로 관조하는 사람들은 불합리한 진술을 사실로 믿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맹종을 주문하는 것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오해와 단절은 기독교 신앙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저는 이 문제를 문학적 비유를 들어 철학적인 문제로 살펴봤으면 합니다. 우선 인간 인식의 구조와 그 한계에 대해 제가 이해하고 있는 만큼만 말해 보겠습니다. 제가 칸트의 인식론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전문성이 무슨 대수입니까.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하고 궁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합니다.
말이 어려워지면 은유를 동원하는 게 좋습니다. 골치 아픈 인식론을 노래로 부른 김춘수 시인을 소개했으면 합니다. 그가 한 시집에 의미가 서로 상반되는 두 시를 같이 실어 인간 인식의 한계를 잘 드러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두 시를 같이 읽어 보도록 합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부분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부분
위의 시에서 ‘이름을 불러주다’와 ‘손이 닿다’는 철학 개념으로 ‘인식’을 의미합니다. 인식됨으로써 의미 있는 존재 ‘꽃’이 되기도 하고 왜곡되어 ‘까막득한 어둠’이 되기도 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두 시는 한 시집에 실려 있고 제목도 같다고 봐야 하는데 왜 딴 소리를 하는 거지요. 시인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말하기 위해 이렇게 이율배반을 의도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이 말장난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실생활에서 많이 겪어 알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인식은 개념과 물자체의 합치를 의미하는데 이런 인식의 한계 때문에 대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대상을 모르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선입견 때문에 ‘나’가 타인에게 완존히 엉뚱하게 인식되는 걸 다들 겪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에 부합되는 것에 대해서는 주목하고 잘 모르는 대상은 눈여겨보지 않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변형 왜곡시키는 꼴이 되는 겁니다.
비교적 단순한 대상 사물인 경우에는 이런 오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꼼꼼하게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과’를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사과’는 언제 어디에서 경험한 구체적인 개별 사과가 아닙니다. 경험한 수많은 사과의 일반적 속성만 추려 재구성한 것이지요.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니 머리 속으로 자리잡은 개념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인식이란 이 개념과, 감지된 물자체가 비교되어 합치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취향 즉 개념에 따라 대상은 달리 인식되는 겁니다.
미술에서도 이런 은유는 오랜 세월 동안 맥을 이어왔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은유는 피그말리온과 나르시소스 설화에 얽힌 것입니다. 다음 두 작품은 두 설화를 이미지화 한 것 중 잘 알려진 것입니다. 피그말리온과 나르시소스 둘다 자신과의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사랑은 다 이런 게 아닐까요. 셍텍쥐베리는 [어린왕자]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 내 세계관의 퍼즐에 끼워 맞추어졌다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 결국 나는 그 누군가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취향대로 변형 인식된 내 속의 개념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문론 개념이 형성될 때에는 내 세계관이 개입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에게 투영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빚어낸 개념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장 레옹 제롬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카라바조 - 나르시소스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갈라테아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달라고 빌었다는 이야기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결국 연못 속으로 뛰어든 나르시소스를 인간 인식론의 한계를 형상화한 설화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과 미술과 같은 예술 표현뿐만 아니라 신성관에 얽힌 종교적 담론도 이런 인식론적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사과 같은 단순한 사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데 그 대상이 ‘신’이나 ‘신앙’인 경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머리 속에 자리잡은 개념이 천차만별로 엄청 다양하겠지요. 언어학적으로 소통이란 기표(記標, 랑그)에 의해 떠오른 기의(記意, 빠롤)가 일치할 때에게 가능하게 되는데 이렇게 떠오른 의미(빠롤)가 일치하지 않으면 어떻게 소통이 가능할까요. 이러니 수없이 논쟁을 하게 되는 거고 나중에는 형식적 합의를 위한 도그마(맥락을 제거한 신념)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자, 이제 마크스 보그의 얘기를 살펴 봅시다.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바로 이 도그마 역할을 했습니다. 마크스 보그는 ‘교황무오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의 권위가 의심받으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이어서 계몽주의가 득세를 하게 됩니다. 도그마가 우리의 인식틀을 규정해 버려서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이를 부수어야 한다는 생각을 널리 확산시킵니다. 그래서 많이 자유로와졌을까요. 간단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도그마는 소통의 전제로서 역할을 했던 것인데 이 도그마가 사라지면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계몽주의가 발흥하고 민족주의가 개화한 것은 필연적인 순서였습니다. 성서도 각 민족어로 번역되었지요. 그렇게 되면서 성서의 기호(랑그)가 아주 다양한 의미(빠롤)로 해석되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되겠습니다.
마크스 보그가 말한 ‘성서무오설’ 또는 ‘문자주의’는 바로 이런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저마다 다른 언어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게 되면 소통이란 불가능해지고 마니 이제 성서가 그 도그마 역할을 해야 되었습니다. 사제들의 전유물이자 라틴어로 기록된 성서를 일반인이 생활언어로 접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은총을 입은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셀 수 없는 종파와 교회 수만큼의 이종 관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동의를 얻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더 본원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전하는 기적적 사건들을 은유로 이해하지 않고 사실로 믿으려 드는 것은 터무니없으며 유치한 발상이라는 생각은 흔쾌히 동의하기 힘듭니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개념을 통해서만 물자체에 접근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무엇이 사실이고 어떤 기록이 사실에 의거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크스 보그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대 초창기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도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에 동의하고 지금의 대전환은 대척점을 마련하고 네거티브 전략으로 상대를 적그리스도로 몰아붙이는 식의 패러다임 전환은 안 된다, 동의하지 않으면 배제해 버리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고 그는 보고 있는 듯합니다. 마크스 보그는 신뢰, 충실, 긍정적 비젼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성을 굳이 분석하여 나눈다면 知, 情, 意로 삼분하는 것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인데 저는 이를 판단, 양심, 충성으로 이해하기를 권합니다. 마크스 보그는 지적으로 동의하는 방식으로 신앙에 접근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너무나 협애하게 만드는 것이라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문제는 신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문화적 불구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지성에 너무 편향되어 생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양심이나 충성심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분석과 판단은 아주 중하게 여깁니다. 이 사회는 지금 심각한 불구 상태에 빠져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신앙은 이런 불구상태를 치유해 온전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믿음(信)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글자 그대로 ‘타인의 말’로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마크스 보그는 믿음을 진정한 관계의 형성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 믿음(信)이라는 글자가 남의 말이란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러른다(仰)는 건 글자 그대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는 건 나의 양심과 대화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관계에 충심으로 성실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마크스 보그는 동양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신뢰, 충실, 비젼은 동양학의 핵심 개념인 人性을 이루는 知情意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이 이런 얘기와 다 통하는군요. 우린 뭐든 머리로 해내려고 머리만 굴리느라 마음(심장)이 병들고 손발(성실)이 굽었습니다. 믿음이란 진실한 관계 맺기와 다른 게 아니고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분석과 판단이 장애가 되며 아픈 이를 보면 불쌍히 여기는 양심(양심을 가장 쉽게 이해하면 동정심이라고 생각합니다)을 저버리지 않고 맺어진 관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충성은 올곧은 마음(心+中)으로 실천(誠, 말한 대로 이룸)한다는 뜻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사랑이 손발에까지 내려가도록 성심을 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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