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감성지수) 높이기

가짜 관계보다는 차라리 자폐 [다슬이]

체거봐라 2012. 2. 20. 12:27

[다슬이]의 원래 제목은 [플라이 아이]였답니다. 무슨 뜻일까요. 날아다니는 눈(飛目)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나는 아이(飛童)란 뜻일까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영화 감독을 만나면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목을 왜 바꿨냐고. 저는 바뀐 제목이 더 좋습니다. 극중 인물 다슬이 삼촌은 다슬이를 '다슬복'이라고 부르는데 똘똘하고 복 많은 아이라는 뜻으로 짐작됩니다. 이 제목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다슬이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데 참 슬기롭습니다. 자폐아인데 세상과 제일 잘 통하는 아이입니다. 참 역설적이지요. 그래서 슬리로운 아이, 다슬이가 작품 제목으로 안성마춤이라는 겁니다.

 

스토리는 참 단순합니다. 그런데 품은 의미는 단순치 않습니다.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았는데 난해할 수도 있는 표현 기법이 도처에 숨겨져 있습니다. 눈사람을 날아오르게 하기 위해 기어다니는 게를 붙여 주는 것이나, 바보 다슬이의 그림을 읽지 못하는 똑똑한 정상인들이나, 삼촌이 눈사람 집을 마련해 주는 바보같은 짓을 하고 나서 비로소 다슬이에게 호명(呼名)되는 것이나, 다슬이가 할머니와 삼촌을 위해 한 일로 그들을 영영 잃게 된 것이나 모든 게 저에게는 묘한 역설로 읽혔습니다. 혹시 감독을 만나게 되면 이것도 물어보고 싶네요. 궁극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삶의 역설' 아니냐고.

 

이 작품을 평하면서 자주 언급하는 개념이 '서번트 증후군'이더군요. 서번트(savant)는 천재라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는 서번트 신드롬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천재를 선망하지요.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은 자식이 천재이기를 바라고 영재 프로그램에 넣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지요. 그러니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은 다 서번트 증후군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대한민국 학부모들에게 "누가 자폐인가?" 하고 되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폐아 다슬이를 지켜보며 연민에 휩싸여 감동할 겁니다. 나쁠 건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눈물 짓는 것만큼 예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약육강식의 이 살벌한 세상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다슬이가 되묻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진심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바야흐로 실시간 관계망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우리 관계는 오히려 갈수록 척박해지는 느낌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찻길을 걸을 때에조차 부단히 소통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는데, 그만큼 진정 우리의 관계는 돈독해지고 있는 것인가요? 수많은 소통과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을 절해고도로 유폐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요. 그러니 역설이라는 겁니다. 관계를 맺을수록 점점 고립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수천 명의 팔로우와 페이스로 엮여 있는데 말입니다. 옛날에는 소통을 거부하는 자가 고립되었는데 이제는 소통의 바다가 개인을 익사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저만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런 거짓 관계들일랑 모두 걷어 버리고 혼자 면벽(面壁)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태가 패거리를 짓고 휩쓸려 다니는 게 유행인지라 단독자로 사는 게 참 고달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아가 튼튼하지 않고서는 관계라는 게 참 부질없다는 겁니다. 각성하지 않은 자들의 회합이란 뜬구름과 같아서 한 줄기 바람에도 쉬 흩어지고 만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헛된 명망을 탐하지 않으니 그런 이들과 관계 맺기란 수월치 않습니다. 그러나 심지가 굳은 자들의 결의는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지요. 내면을 성찰하지 않고 남 눈치만 보는 이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허황된 관계를 탐하지 말고 단독자로 묵묵히 내면을 응시해야 합니다. 남이 뭐라든 말든. 다슬이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낸 눈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