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했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상처를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가족을 위해 성의를 다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성가시다고 하면 정말 상처받습니다. 배신감마저 들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려면 먼저 그가 뭘 원하는지 살펴야 하잖아요. 내 딴엔 위한다고 하지만 그게 위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옥죄는 것일 수 있답니다. 맞아요. 제 눈에 보기 좋다고 내 취향도 아닌 옷을 억지로 입으라고 하면 고마울 리가 없지요. 그러니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고집이요 독선일 뿐이지요.
아버지가 선행을 자주 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인데, 아이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다른 애들한테 더 잘하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울 리 없습니다. 의로운 아버지가 집안에서 존경받는 건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아이한테 정의감은 누가 가르칠 수 있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교육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사람보다 나한테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건 인지상정이잖아요. 밖에서는 참 좋은 분이라는 칭송을 받는 아버지가 집안에서는 가족들로부터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일상을 차리느라 고생했는데 사전에 말도 없이 보육원 아이들을 불러들여 생일상이며 생일 선물까지 내어주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아버지입니까. 이런 아버지와 같이 사는 가족들은 참 힘들 것 같아요. 아버지의 선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내 성의가 무시당한 것 같고, 나보다 남의 애들한테 더 각별한 것 같아서 서운한 게 인지상정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무심해 보이는 아버지가 실상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진실하다고 봅니다. 자식이 남보다 잘나서 부모 낯을 세웠으면 하는 욕심이 있으면 이러지 못하지요. 자식이 잘나든 못나든 사랑이야 한결같은 것이잖아요. 세상 그늘진 곳에 눈길을 주는 착한 마음으로 자식도 품는 게 진실한 사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운한 마음이 눈앞을 가려 그 진실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뭐든 다 그렇겠지만 참다운 건 눈에 잘 보이지 않잖아요. 정말 사랑한다면 그 귀한 걸 의로운 일에 선뜻 내어놓게 마련입니다. 욕심이 앞서면 이런 의로운 사랑이 아니꼬울 수 있는데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내 정성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수 있지만 내 정성이 더 넓게 행복을 전파시키니 그 사랑 백 배는 더 아름다워진 셈이잖아요. 그러니 미워할 일이 아니라 더 많이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지요. 아프면서 성숙해진다잖아요. ‘세만’이는 참 다행입니다.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친근한 아버지와 경외감(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드는 아버지 중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까요. 우리 사회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로 고민해온 소중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애들까지도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 웬만하면 다 압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의(義)가 먼저인지 친(親)이 먼저인지 수천 년 고민을 해 왔다는 것이지요. ‘의(義)’가 무엇인가요.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의(義)’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건 참 반가운 일입니다만 우리는 이 얘기를 수천 년 해왔습니다. ‘센델’ 교수가 ‘미덕’이라고 말한 정의의 요소는 글자 ‘의(義)’ 속에 이미 새겨져 있었습니다. ‘양(羊)’은 제물로 쓰는 희생양이라는 의미이고 ‘나(我)’와 결합하여 ‘의(義)’는 ‘나를 희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는 건 참사랑이 아니며 의로운 심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참 어려운 얘기를 먼 옛날에 벌써 했던 겁니다. 수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뭔가 더 나아진 게 있기나 한 건가요.
선조들은 ‘의(義)’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식과 소원해지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일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 자식 사이에 친근함이 없다면 그 뜻이 전해질 리가 없지요. 그래서 부자지간은 ‘친(親)’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모양입니다.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바라본다(見), 즉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이렇게 기다리는 게 참다운 교육이요 참사랑이란 걸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꾸 어려운 한자어를 꺼내 무람하지만 도덕경에 기막힌 구절이 있어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그 깊은 뜻이야 한량없겠지만 저는 이 구절을 배움의 수준을 잘 구분해 준 통찰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도덕경 38장에 ‘인(仁)’을 잃으면 ‘의(義)’를 강조하고(失仁以後義) ‘의(義)’를 잃으면 ‘예(禮)’를 강조하게 된다(失義而後禮)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어질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시비를 따지고 나중에는 처벌(法)까지 하게 되는 거잖습니까. 선행을 하더라도 남의 눈에 띄길 바라면 그건 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니 참다운 어짊(仁)이 아니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도덕인의예법((道德仁義禮法)’을 배움의 수준으로 마음에 새기고 싶었습니다. 가장 높은 수준은 가르치려는 의도를 갖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데 그게 감동을 주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수준은 벌칙을 정해놓고 어기면 벌을 내리는 것이랍니다.
의로움(義)이 어진 마음(仁)과 더불어 거슬리지 않으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공감이 되어 스스로 배움(德)이 있습니다. 참다운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는 것이랍니다. 높은 덕(德)은 내세우지 않는 것, 상덕부덕(上德不德)이랍니다. 그런데 요즘 교육이 너무 조급하여 무례(無禮)만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의로움(義)로부터 사랑(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말지요. 재능으로 서열을 짓고 징벌(法)로 다스리는 게 능사인 이 저급한 사회에 참다운 인(仁)과 의(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작품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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