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꼭 30년이 지난 2017년 연말에 그 시대를 다룬 영화 [1987]이 개봉되었다. 한 세대가 지났다. 우리 세대에게는 직접 겪은 일이라 기억을 되살리며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요즘 20대들에게는 너무 먼 옛날 일이라 별 느낌이 없을을 것이다. 먼 과거의 일을 두고 세대차 나는 젊은이들과 공감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옴으로써 요즘 젊은이들과 한 세대 전 역사의 현장으로 함께 갈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사족이 될 수도 있겠지만 30년 동안 그 시대가 어떻게 그려져 왔는지 6월 항쟁 팩션의 역사를 함께 둘러보았으면 한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그리 무모할 수 있는가?’ 이해가 되지 않을 일들이 그 시대에는 참 많이 일어났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코미디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기 이전에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았다. 1960년 4.19의거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민주 정부가 세워졌는데 1년만에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독재가 시작되었고, 10년 뒤 1972년에 유신독재 체제가 들어설 때 대통령 간선제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설마?’ 하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한 사람 추대하고 선거인단이 체육관에 모여 100% 찬성으로 대통령을 뽑는 이 웃기는 짓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간 자행되었다. 의기 있는 젊은이들이 나서서 전두환 정권의 말도 안 되는 이 짓거리를 혁파한 게 87년 6월 항쟁이다.
호헌조치로 독재 권력을 연장시키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은 80년 광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추악한 권력이다. 80년대는 내내 광주항쟁의 그늘 아래 있었다. 나 또한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맞이한 첫 5월에 캠퍼스에서 열린 5.18 사진전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아 그 이후 젊은 시절 내내 독재 권력에 대에 반감을 갖고 살았다.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젓가슴” 노랫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 끔찍한 장면이 지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87년 6월 항쟁은 80년 광주 항쟁의 연장이었다.

6월 10일 명동성당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날 하루를 정리해 보자. 87년 6월 10일은 전두환 독재당이 잠실체육관에 모여서 대통령 후보를 세운 날이다. 이 날에 맞춰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12대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87년에는 말도 안 되는 선거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끓어오르는데 그해 4월 전두환 대통령이 기존 선거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호헌철폐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호헌철폐 운동은 인천 5.3항쟁으로 폭발하고 6.10 항쟁으로 이어졌는데 꽃다운 젊은이의 산화(散花)가 항쟁의 열기를 들끓게 만들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앞 이한열
87년 1월에 서울대 학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그 열기가 6월 10일로 모이게 된다. 바로 전날에는 ‘민주 헌법’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나선 연세대학교 2학년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는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 타락한 정권은 5.3항쟁의 배후를 캔다며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처녀를 성고문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부도덕한 정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의기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함성으로 온 국토를 뒤덮게 된다.

5월 23일 남대문에서 서울역까지 연와시위 장면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가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5월 23일에는 시위대가 비 내리는 길바닥에 드러눕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5월 27일에는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6월 9일에는 연세대 출정식 직후 이한열군이 직격탄을 맞고 쓰러진다. 6월 10일 잠실체육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날에 맞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 열렸다.

서울시청 앞 이한열 장례식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이 일파만파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집권당 대통령 후보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겠다며 6.29선언을 하게 되고 7월 9일 이한열 국민장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든다. 민주주의 열화(熱火)는 이렇게 타올랐다. 이 뜨거운 열기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번지고 우리 역사는 바야흐로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4.19의거와 광주항쟁 때 사선을 끝까지 지켰던 자들은 대부분 기층 민중이었는데 6월항쟁 때에도 명동성당을 끝까지 사수하자는 불굴의 투사들은 주로 노동자들이었다. 이 힘이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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