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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교훈

체거봐라 2022. 4. 3. 10:27

해방된 지 3년 1948년 제주에서는 너무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제주도 북촌리 ‘너븐숭이’에 널려 있는 수많은 애기무덤은 그때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돌림병이 돌아도 저렇게 끔찍하지는 않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기들이 무더기로 묻혔을까. 그 옆으로, 소설의 한 장면처럼 줄지어 서 있는 무덤 위에 까마귀 때가 내려앉아 있는 모습도 참 심란하다. 일본놈들에게 그렇게 당하다가 해방이 되었는데 동족에게 더 심하게 당했으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 날로 돌아가 보자.

 

제주 4.3평화공원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면서 곧바로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선다.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가 자생적으로 성립되었고 그 연합체로 ‘조선건국동맹(건맹)’ 결성되었지만 미군정이 민주적으로 형성된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건맹’은 해체되고 만다.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남한을 관리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 고착화를 위해 남한 내 신탁통치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려고 한다.

 

미군을 등에 없은 친일파 세력은 제주도에 반공 폭도 서북청년단을 투입하여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하면서 남한에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극단으로 부추긴다. 4.3사건은 우리나라 비극적 분단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외세와 그에 빌붙은 배신자들의 농단으로 우리 민족이 유린당했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 북초등학교   강요배 그림 [해방]

 

4.3사건은 48년에 발생했지만 이 사건은 한 해 더 거슬러 올라가 47년 3월 1일 경찰 발포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3.1절 기념집회에 모인 군중이 우리 조국의 통일 정부 수립을 방해하지 말고 미국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 열기가 달아오르자 경찰이 총을 쏘았고 그 자리에서 여섯 명이 즉사하는 일이 발생한다. 관덕정 일대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고 그 혼란 중에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짓밟혀 부상당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경찰이 발포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제주 도민은 미군정 경찰에 항의하여 총파업을 벌이게 된다. 이 파업에 제주도 출신 경찰까지 참여했으니 이는 제주 도민 전체의 저항이라고 봐야 한다. 만행을 저질렀던 경찰은 사과하기는커녕 육지에서 서북청년단을 투입해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제주 도민은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경찰과 친일 단체를 공격하면서 전쟁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4.28 평화협상이 이루어지면서 4.3 유혈사태가 중단되는가 싶었는데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지면서 유혈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무장 공비가 불을 질러 온 마을을 불 태웠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곧 밝혀진다. 미군은 ‘서북청년단’이 방화 주범이라는 조사 결과를 보고한 ‘김익렬’ 6연대장을 전격 해임하면서 무장 공비가 방화 주범이라고 선전하는 ‘제주도 메이데이’ 영상을 만들어 배포하였던 것이다.

 

‘제주도 메이데이‘ 영상 中에서

 

미군은 오라리 방화 사건을 조작하여 선전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다. 미군 수뇌 딘(William Dean) 소장이 5.10 선거 전에 무장대를 완전 소탕하라고 명령하면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300명 정도의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무려 그 백배나 되는 3만 명의 주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오라리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열흘 만에 남한에서 5.10 단독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선거가 진행될 수 없었다. 8월 15일 수립된 단독 정부는 그해 10월 제주도에 군대를 증파하고 바로 그 다음 달에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다시 초토화 작전을 벌여 수많은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인다. 초토화 작전 중의 하나인 1949년 1월 17일 조천읍 북촌리 학살은 너무나 끔찍했다. 소설가 현기형의 『순이 삼촌』은 이 때 벌어진 일을 그린 소설이고 화가 강요배는 가장 끔찍했던 장면을 그림 [젖먹이]로 그렸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 현기영 <순이 삼촌> 중에서 -

 

 

강요배 그림 ‘젖먹이’

 

4.3 학살 사건의 전말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그 배후에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일 민족 반역자들의 농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제주 4.3 학살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이는 서북청년단을 토벌 작전에 동원한 작전참모 ‘최치환’이다. 이 자는 일제강점기 때 만주 신경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중위로 복무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내무부 치안국에 소속되어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했고 4.3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진압경찰의 지휘관 작전참모로 제주에 파견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내무부 치안국의 기록 ‘한국경찰사’, 최치환 추모회 ‘금암회’에 기록된 약력).

 

최치환은 제주 4.3 학살을 주도하면서 반공 정권에 의해 인정을 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박정희 정권 때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했고 유신 시대에는 경향신문 사장, 전두환 정권 때에는 삼성반도체 사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야말로 이 나라 권력의 심장부가 되었다. 일제에 빌붙어 민족을 배신한 이들이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 붙어 권세를 누리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그들은 지금도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 지도자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