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여린 젊은이들한테 이런 끔찍한 얘기를 꺼내는 게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무모한 행동’이 어떻게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하기 위해서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대단한 의인(義人)이라서 그런 용기를 낸 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하루하루가 고역인 우리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보통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겁 없이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너무 끔찍하면 시름이 깊어지고 너무 겉돌면 공감이 안 되니 함께 나눌 적절한 작품을 찾는 일이 수월치 않았는데, 마침맞게 젊은이들에게 친근한 만화로 6월항쟁을 그린 작품이 있어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최규석의 만화 [100°C]는 세대차 나는 젊은이들과 한 세대 전으로 동반 역사 기행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작가 최규석은 [송곳]이라는 노동만화로 유명한 분입니다. 제목 ‘100°C’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물은 99°C가 될 때까지 겉보기에 별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답답하지요. 그 답답증을 못 이겨 99°C가 다 되어서 그만두면 얼마나 아까울까요. 조금만 더 참으면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날 텐데 말입니다. 우리 역사가 꼭 그랬습니다. 60년 4.19혁명은 5.16쿠데타로 더럽혀지고 80년 광주항쟁은 12.12쿠데타로 짓밟히며, 87년 6월항쟁은 야권 분열로 좌절되고 맙니다. 정말이지 너무 답답합니다. 지금 우리는 몇 °C 쯤에 와 있을까요. 막바지를 참지 못하고 또 그만두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공 ‘영호’는 가난한 집 자식이라 부모님이 뒤를 잘 대주지도 못하는데 참 착실해서 공부는 늘 우등생이었고 반공 웅변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 올 만큼 똘똘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까지 보낸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한 눈 팔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 80년 광주의 끔찍한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고 반공 청년은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 섬뜩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갓 입학해 맞이한 첫 5월에 캠퍼스에서 열린 5.18 사진전은 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젓가슴” 노랫말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하던지…….
‘영호’가 어느 날 데모하는 빨갱이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다 미친놈들‘이라고 맞장구를 쳤는데 공장 다니는 여동생이 “자기 인생 희생해서 남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욕할 수 있느냐고 눈물로 호소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영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86년 10월 28일에 일어난 건대항쟁에 가담하게 되는데 ‘영호‘ 엄마는 기절초풍합니다. 6.25 때 부모님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돌아가셨으니 자식이 부모님처럼 빨갱이로 몰려 죽게 될지도 모른다 싶었던 겁니다. ‘영호‘ 엄마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쫓아다니면서 부조리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고 운동권이 된 아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남편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민가협‘ 활동가로 나서기까지 합니다. ‘영호’ 엄마는 권인숙 양 부천서 성고문 사건 공판을 참관하다가 판사가 피고의 발언을 중단시키자 방청석에서 벌떡 일어나 “듣지도 않고 잡아넣을 거면서 재판은 왜 하냐.”고 소리를 냅다 지릅니다. 아들 ‘영호’가 겪은 대로 유치장에 갇히기까지 하지요.
‘영호’네 가족은 86년, 87년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다 겪습니다. ‘영호’의 형 ‘영진’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이렇게 겪습니다. ‘영진’이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TV에서 박종철 의문사에 대해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면서 분개하는데, 옆 자리에 있던 젊은이가 ‘자본의 단물이나 빨아먹고 있는 양반’들이 종철이의 죽음을 더럽히지 말라고 비아냥거리자 ‘영진’의 상관 이대리가 젊은이의 멱살을 잡고 “너희가 유신(독재)을 아냐?”고 소리치고 ‘영진’은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까지 밀쳐내면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따져 묻습니다. 머리로 변혁운동 하는 자들의 허위의식을 잘 꼬집은 대목입니다. 박종철 열사가 자기 목숨을 바쳐 지켜낸 운동권 선배 박종운이 변절하여 박종철을 죽인 정치세력과 야합한 천인공노할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100°C] 5월 23일 종로 연와 시위
연와시위 실제 장면
[100°C]는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가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연이어 벌어진 87년 5월 23일 탑골공원 앞 우중(雨中) 연와시위, 5월 27일에 향린교회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대회, 6월 9일 연세대 출정식 직후 발생한 이한열군 직격탄 피격 사건, 6월 10일 잠실체육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같은 날 열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까지 숨 막히게 전개된 나날을 낱낱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단 한 권의 만화에 이 수많은 사건들을 담아낸 작가의 가쁜 호흡에 숨이 막힐 듯했지만 현장을 뛰어다니는 듯한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년 독자들이 이 가쁜 호흡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민주화 열기가 바야흐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을 맺으니 아쉽기도 했습니다.
[100°C] 6월 9일 이한열 피격 장면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이한열과 이종창. 내셔널지오그래픽 네이선 벤 정문 앞 굴다리 위에서 촬영
6월항쟁은 6월 10일 국민대회를 기점으로 우리 역사의 새 장을 펼쳐내기 시작하는데 [100°C]는 여기에서 중동무이된 듯해 그 뒤를 이을 이야기를 백방으로 찾았습니다. 6월항쟁의 그 뜨거웠던 현장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꼭 명동성당을 찾아가 봐야 합니다. 6월항쟁을 형상화한 대부분의 소설이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그리고 있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국민대회가 열린 10일부터 자진해산 한 15일까지 명동성당은 투쟁의 구심점이었으며 이 시대의 모순이 응집된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많은 소설가들이 그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고 그들이 직접 목격한 것을 기록했으니 6월항쟁의 형상화는 비교적 풍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 이야기를 이어갈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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