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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행적

체거봐라 2018. 6. 15. 07:41

갑오농민전쟁 다음 해 1895년(19세) 2월 청년 김구는 국모 살해(을미사변)의 원한을 갚으려고 대동강변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다. 체포되어 취조를 당하다가 인천 감리서로 이감되었다.


 
1880년대 감리서


현재의 감리서 터 (사진 중앙의 아파트)


1898년(22세) 3월 19일 밤 탈옥을 감행하고 전국을 떠돌며 여러 지사를 만나 교분을 트면서 성장하였다. 1904년(28세)에 고향 해주에서 결혼한다. 1910년(34세) 신민회 결성에 가담하여 황해도 대표까지 맡게 된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고 3년만에 가석방된다. 1919년(43세) 3.1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가 임정 수립에 참여한다.


상해 지도


상해 탐방 중 묶을 숙소가 있는 와이탄 거리의 황포강 유람선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푸동항은 불야성을 이뤘다. 여기 당도한 김구 선생이 본 포동(푸동) 마두(부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푸둥’의 우리말 발음은 포동, 황포의 동쪽이라는 의미이다. ‘와이탄’은 ‘외탄’으로 읽고 바깥 여울이라는 의미이다.



외탄(와이탄)에서 바라본 포동(푸둥)의 옛 모습


같은 위치에서 바라본 푸둥 지금 모습


압록강을 넘어 중국 단둥에서 배를 타고 상해 푸둥(황포강 동쪽 동방명주 쪽) 부두에 도착하여 황포 강가 공승서리 15호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가족들도 생해로 건너와 동거하게 되지만 온갖 고생 끝에 자식 넷을 잃고 1924년(58세)에 아내까지 잃는다. 프랑스 조계지 숭산로 공동묘지에 아내를 안장했다.


황포 공원에서 바라본 외탄(와이탄) 옛 모습


반대쪽에서 바라본 와이탄


외탄 거리 지금 모습


이봉창 윤봉길이 찾아올 무렵 임정은 프랑스 조계지 마랑로 보경리 4호(현 노만구 마당로 306롱 4호)에 소재했다. 1931년(65세) 법조계 중흥여사에서 이봉창을 만나 천황 암살 계획을 논의했다. 1932년(66세)에는 윤봉길이 찾아오고 홍구공원(홍커우 현 루쉰공원)에서 의거한다. 중국 파견 일본군 대장 등 수뇌부가 즉사하고.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김구는 미국인 피취(비오생) 씨 집, 가흥 수륜사창, 해염현성 주씨 댁을 돌며 피신 은거한다.


충남 예산 윤봉길 의사 생가


매헌 유봉길은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11세) 3.1운동이 일어나자 소학교를 자퇴를 하고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1926년(18세)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한글보급운동,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을 선전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추세였다. 1929년(21세) 광주학생의거(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일) 등 학생 항일 운동 소식을 접하고 다음 해 가출을 결단한다.


홍구공원 윤봉길 폭탄 투척 장면(현 루쉰 기념탑 자리)


이봉창 의거 소식을 접하고 지신도 조국을 위해 투신하기로 결의하여 김구 선생을 찾아온다. 1932년(24세)에 홍구공원 일본군 승전 기념식에서 폭탄을 투척한다(연단 아래 계단 앞 흰 도포). 현장에서 체포되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처형된다. 홍구(홍커우) 공원은 뤼쉰공원으로 개명되었고 의거 위치에 루쉰 기념탑이 설치되었고 기념관 ‘매헌’이 세워졌다.


홍구공원(루쉰공원) 매헌(윤봉길) 기념관


지조를 꺾지 않은 분들은 하나같이 말년이 처참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일본으로 압송 총살되어 도로에 암매장 되고 시신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박열 열사에 의해 본국으로 봉환되었다. 김구 선생은 해방후 통일운동을 하다가 이승만의 측근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의사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에도 대대로 권세를 누렸다. 윤봉길 의거 때 피격당해 절름발이가 된 시게미쓰 주중대사는 롯데 신격호 회장 둘째 부인의 외삼촌이다.


1946년 김구 윤봉길 가족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