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박녹주와 김유정
김유정은 젊은 시절 스켄들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휘문고를 다닐 때 판소리 명창 박녹주에게 반하여 스토킹을 한 일이 유명하다. 김유정이 목욕탕 앞에서 박녹주가 나오기를 기다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박녹주가 목욕을 하고 공중목욕탕을 나서고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릿결은 더욱 눈부셨고 말갛게 씻긴 새하얀 얼굴 살갗이 꼭 애기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정의 가슴은 금방 터질 듯 두근거렸다. 녹주는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일거수이투족은 유정 눈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는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녹주의 앞에 유정이 나서며 길을 막았다.
"누구신지?"
"선생님의 소리를 좋아합니다."
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요?"
"선생님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녹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젊은 총각이 내미는 쪽지를 받자 유정은 급히 뒤돌아서서 큰길로 걸어 나갔다.
유정의 집착이 날로 심해지자 녹주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싶어 그를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녹주는 유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
유정은 아무 기척이 없이 얼굴을 숙이고만 있다.
휘문고를 졸업한 해였으니 열아홉, 끓어오르는 혈기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녹주에게 퇴짜를 맞은 유정은 밤잠을 설치며 편지를 쓰곤 했다.
녹주는 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놈이 뭘 안다고 기생인 자기를 좋다고 저러는지 한심하기만 했다. 나이야 몇 살 차이나지 않지만 겪은 것으로 치면 자식뻘인데 사귀자고 덤비니 가당키나 한가. 첫 편지를 읽고 ‘철없는 놈 같으니.’ 혀만 끌끌 찼다. 다음부터는 아예 편지 봉투를 뜯지도 않았다.
유정은 집착이 더 심해졌다. 녹주의 뒤를 밟기도 하고 편지에다 협박하는 말을 쓰기도 했다.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당신은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녹주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유정의 속은 타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절실한 마음을 전달할지 고심했다. 손가락 끝을 칼로 베어내고 피를 짜내어 혈서를 썼다.
“오늘 너는 운수가 좋았다. 엊저녁에는 문 앞에서 너를 기다렸으나 네가 나오지 않았다.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린 게 세 시간. 만일 날 만났으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절대로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밤을 지새우며 편지를 쓰고 집 앞에서 종일 기다리며 온 정신을 한 데 쏟느라 유정의 몸은 점점 약해졌고 폐병까지 앓게 된다. 녹주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그를 술에 절어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병세는 악화되어 갔지만 글은 점점 좋아졌고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녹주를 잊을 수가 없었다. “녹주를 연모한다.”고 혈서를 남기고 요절한다.
김유정의 장례를 치르고 유정의 친구 안회남은 술에 잔뜩 취해 박녹주를 찾아갔다.
"당신이 박녹주요?"
녹주는 웬 놈이 또 치근대나 싶어 얼굴이 굳은 채 싸늘하게 내뱉었다.
"뉘시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거 너무 무례한 거 아니오?"
회남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당신이 내 친구를 죽였소. 그 놈이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결국 저 세상으로 갔소."
녹주는 그토록 자신을 성가시게 했던 유정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걸 금방 알아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외면해 버렸다.
"난 모르는 일이오. 그만 가시오."
녹주는 매몰차게 뒤돌아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박녹주는 나중에 회고록에다 미안한 마음을 써서 남겼다.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하여 내가 평생 슬하에 자식 없이 살았나 보오. 손이라도 한 번 잡게 해 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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