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의 품질
자녀가 초등학생 정도 되는 4․50대 학부모님들은, 학생 시절에 관제 데모에 동원되어 영문도 모르고 구호를 외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땐 정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군말 없이 해야 했다. 사회는 병영과 다를 바 없었으니 감히 누가 거역할 엄두를 내겠는가. 주권재민(主權在民)은 이론서에서나 만날 수 있는 말이었고 행정서비스란 말은 관(官)의 서슬 앞에 주눅 들기만 하는 국민에게는 망발에 가까웠다.
참 많이 변했다. 섣불리 동원하려고 했다가는 최고 권력자도 여론의 뭇매를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공무원은 행정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가끔은, 말도 많고 시비도 끊이지 않는 참 피곤한 세상이 되었구나 하고 넋두리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간사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자신에게 매를 든다. 죽음을 넘어 압제를 물리친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만 게으른 소치로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상품처럼 다루는 게 배우는 사람에게 얼마나 득(得)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서비스(?)의 품질 향상 노력이 구시대적 권위주의를 몰아내고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로 진보하기 위한 한 과정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천시교육청이 행정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내 자녀 바로알기 학부모서비스’ 사업은 말로만 혁신이고 실상은 구태를 벗지 못한 듯해, 일선에서 실무를 처리해야 하는 교사로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학부모님들께서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해 자녀의 학교생활에 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인데, 얼핏 듣기에 참 편리하겠구나 싶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실속도 없으면서 귀찮게만 한다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학생의 개인 정보를 열어보는 일이니 정보에 접근하는 절차를 아무렇게나 할 수 없어 학부모 인증절차를 두었는데 학부모에게는 이런 절차가 성가실 수 있으니 학생에게 학부모 대신 등록하게 하거나 아예 학부모의 주민번호와 비밀번호를 적어내게 하여 교사가 등록을 대행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일이 혁신 사업이라고 추진되고 있으니 어찌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염치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굳이 밀어붙이는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인천시교육청이 교육부의 평가를 계속 나쁘게 받아 재정상의 불이익을 받으니 이번에는 ‘내 자녀 바로알기 학부모서비스’ 사업에서 성과를 내어, 늘 교육부 평가를 잘 받는 부산시처럼 되자고 설득하는 모양이다. e스쿨 운영이 2006년 지방교육혁신 우수 사례로 선정된 경험도 있고 하니 컴퓨터 전산망을 이용한 사업에 자신감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e스쿨을 만들 때에도 이용자가 없어 가입자를 늘리도록 일선 학교를 못살게 하지 않았는가. 인천이 부러워하는 부산은 오히려 올해 혁신과제를 ‘일선학교를 효과적 지원하는 교육행정’으로 잡고 있고, 이는 기존 장학업무가 실적 및 평가 중심으로 이뤄져 일선학교에 부담만 준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인천은 품질 향상보다 가짜라도 만들어서 팔아먹기에 바쁘다는 비난을 살 수도 있겠구나. 학교에서 시키는 일이니 타박은 못 하시고, ‘세상은 다 변했는데 학교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시는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먹지를 대고 연습지를 다량 위조해 내는 학생을 어찌 나무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무거운 행정 업무로 교사가 학생들의 내면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건 참을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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