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학교로 돌아가며 - 책상물림 비가(悲歌)

체거봐라 2009. 3. 11. 20:53

책상물림 비가(悲歌)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긴요치 않은 얘기를 늘어놓는 것 같아 무척 불편하지만, 수 천 조합원을 대신한 일 년을 마감하며 소회가 없는 것도 말이 안 되니 진심을 다하여 배운 바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 년 동안 수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뇌리에 박힌 이야기는 최근 한두 달 동안 들은 것뿐입니다. 기억력 문제라기보다 뭐든 막바지에 가서야 보이게 마련인 이치 때문일 겁니다. 


작년 연말 한 강연회에서 신영복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감옥에 계실 때 만난 한 젊은이 얘기는 책상물림인 나에게 매운 회초리가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 이름이 '대의'였답니다. 大義, 이름이 참 멋있어서 궁금하셨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주신 어른이라면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누가 이름을 지어줬냐고 물어 보셨답니다. 젊은 수인은 버럭 화를 내며 대답을 해주지 않더랍니다. 참 별놈이다 싶었는데 나중에야 '대의'가 광주시 대의동파출소의 '대의'라는 걸 알았답니다. 젊은 수인은 돐 무렵에 대의동파출소 앞마당에 버려졌답니다. 하! 기가 찰 노릇이지요. 선생님은 엄청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소위 운동을 한답시고 무슨 이론이니 주의니 잔뜩 주워섬기는 지식인의 사회 인식이라는 것이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부끄러움으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새해 인사차 경인교육대학교 총장님을 만나 뵈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허숙 교수님께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교육계의 어른이시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학교에서 전할 지식은 없다"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교육자들까지 이 말에 크게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여기고들 있지요.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제 학교는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학교가 필요 없다는 말은 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되지요. 결론적으로 나는 이 사회에서 필요 없는 노릇을 하면서 국민의 세금을 축내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표현하면 좀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김수환 신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카톨릭에 대해 잘 몰라 남들보다 고통이 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시국 사건으로 명동 성당을 드나들기도 했지만 직접 뵌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정구 선생님이나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계신 모습을 언론을 통해 자주 봐 온지라 존경하는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제정구 선생님과 정일우 신부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 분들께 큰 배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 중에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하신 말씀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머리만으로 집을 짓고 땅을 일굴 수는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돈이 될 것처럼 떠벌이지만 그것으로 배를 불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동을 천시하고 마음까지 거래되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가르칠 만한 지식이 우리에게 남아있기나 한가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는 그 분도 사랑이 손발에까지 내려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셨습니다. 제정구 선생님과 정일우 신부님은 "빈자(貧者)를 위해(for) 사시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with) 사신 분들"이라고 높이셨습니다. 허숙 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 교육자가 알량한 지식 따위에 매달려 있으면 안 된다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머리에서 벗어나 양심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제 보니 마음 속으로 모시는 어른들 말씀이 한결 같군요. 머리와 말만으로 세상을 일군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학교로 향하는 올 봄에는 마음에 꽃을 달겠습니다. 가을에는 손마디에 씨앗이 여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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