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들빼기
입에 쓸수록 몸에 좋다 하는데 쓴 젖이 몸 가운데 박혀 있으니 온 몸이 약(藥)이요 명줄입니다. 쓴 차(茶)를 줄기 가운데 품고 있다 하여 ‘고도(苦荼)-박이’랍니다. 한자 荼(씀바귀 도)는 차(茶)와 어원이 같다고 하는데 차의 쌉싸름한 맛을 한껏 농축한 듯한 고들빼기 흰 액이 차의 기원이라 하여도 좋겠습니다. 순우리말로 쓴나물, 젖나물이라 불리는 것도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의 젖처럼, 몸을 위한다는 쌉싸름한 차(茶)처럼 제 몸 다 주어 생명을 보(保)하는 밭두렁 고들빼기에게 절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처음에는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별하지 못해 두런거린 기억이 납니다. 고들빼기는 잎이 줄기를 에워싸듯 자란다는 식별(識別)로 이 이름 모를 잡초에 눈을 주는 나 자신이 대견했더랬습니다. 제 몸 가운데 품은 젖을 내놓고 시드는 민초들을 무슨 척도로든 분별하려는 사리(事理)가 탐탁치 않을 만하니 뒤안길 풀 잎새를 다시 보게 됩니다. 단맛만 좇으면 몸도 마음도 다 삭게 마련이란 걸 이제사 어렴풋하게나마 눈치를 챌 만할 즈음에 고들빼기 속을 들여다보게 된 것도 사는 이치일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덧없다 싶은 인생사가 물 흐르듯 여울진다 싶기도 합니다. 맑디 맑은 물이 설핏 반짝이는 듯도 하여이다.
상추라도 시장에 내어 돈을 사려면 이놈에 고들빼기가 애물단지입니다. 솎아도 솎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주구장창 돋아납니다. 노고(勞苦)를 너무 모른다 싶어 속상합니다. 그런데 이놈에 고들빼기가 돈이 된다 하여 밭을 낸다고도 한다니 세상 일이란 참 모를 노릇입니다. 돈 안 된다 싶을 때에는 천륜마저 들까부는 속된 마당이니 그 영리(營利)를 어느 누가 섣불리 탓하겠습니까만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스레 밭고랑을 넘는 그 처사가 진정한 천연(天然)이 아닙니까. 하늘이 낸 대로 그러하듯 말입니다. 욕심을 일구면서 탈이 나는 법이잖습니까.
다 다르다면 견줄 필요가 없겠지요. 밭 가득 상추만 줄 서 있으니 잘 자란 놈, 비실비실한 놈 금방 구분이 됩니다. 경쟁과 효율이 돈이 되니 우량종을 따로 모시고 열등 종자는 솎아내야 합니다. 우리도 상추밭의 상추입니다. 저마다 다를 게 하나도 없고 줄 서서 고만고만한 키 높이를 다툽니다. 동이불화(同而不和). 다양하지 못하고 획일화되면 평화롭지 못하고 늘 조바심 내며 싸우게 되는가 봅니다. 서로 다른 게 불화(不和)의 원인이 아니고 다 똑같은 게 우리를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고들빼기가 참 고맙습니다. 다들 하찮다 여기는 미물이 실은 말없이 천연(天然)의 미덕을 간직하고 있네요. 저리 천연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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