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스토리텔링

서구 철학사상 줄기와 베르그송 아이디어

체거봐라 2009. 4. 20. 17:57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좀 낯설 수 있는 책이다. 필자는 근대의 언어로 탈근대를 논하는 일이 논리적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베르그송에게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최근 그의 저작 [창조적 진화]를 살펴봤다. 서구인의 철학 저작물을 번역한 책을 읽는 일이 얼마나 고역인지 다들 알 것이다. 특히 근대 과학에 의해 사고를 지배받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베르그송의 번역물이 거의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많은 독자들이 자신이 문외한이라고 섣불리 짐작하지 말길 바란다. 청소년을 위한 베르그송 개설서가 이 모양이니 이건 독자 탓할 일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을 뒤져 베르그송 시대의 역사, 그와 논쟁을 벌였던 이들의 발언, 더 나아가 서구 정신 문화 형성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그송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번역물은 왜 이다지도 비대중적인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구한 글들도 난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베르그송의 사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가 기계론이라고 비판한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베르그송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마찬가지로 그의 이론을 진화론의 아류라고 비판하는 교황청은 베르그송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베르그송을 대척점에 서있는 관념론이라고 비판했고 동시에 정통 기독교 측에서는 가장 불온한 반기독교 이론이라고 비난했다. 이러니 베르그송은 어떤 정치 집단으로부터도 채택될 수 없었고 쉽게 잊혀질 운명을 타고난 이론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근대철학은 플라톤의 적자이거나 사생아일 뿐이라는 말했다고 하는데 베르그송의 입장에서는 이 말만큼 적절한 말도 없을 것이다. 현대인의 생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기원한다고들 하는데 베르그송이 이런 사상사적 정통에서 얼마나 국외적인지 살펴보면 그의 사상이 매력적인 호소력이 있었으면서 왜 곧 잊혀지고 말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화 이전까지의 서구 사상이 어떤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송이 비판한 근대 이후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개인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고대 희랍 사회의 보편적 사고방식이었다.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근대 이후에 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인데, 우리는 보통 중세 기독교의 부패에서 기인한 종교 개혁 운동과 고대 희랍 문화를 되살리자는 르네상스 운동에 의해 이런 사고방식이 다시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던 중세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게 된 근대를 단순 대비하는 데 익숙한 것이다. 철학 사상적으로는 종교혁명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을 통해 중세를 극복하고 근대로 나가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 사상은 알렉산더 이후 이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교접으로 생겨난 사유체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교접으로 형성된 서구 정신문화는 이미 고대시대에 완성된 것이며 중세는 헤브라이즘 편향이며 근대는 헬레니즘 편향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고대 사상사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베르그송 이해를 위해 족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도식화해 온 중세 신본-근대 인본 개념은 터무니 없이 단순화된 발전사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헤브라이즘의 맹아를 유대교 사상에서 찾으려는 편협한 논리 또한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 유대교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트교와 이집트의 내세관이 서로 교접하면서 발생한 부족 종교이니 그 기원을 따진다면 당연히 폭넓게 페르시아 이집트 문화를 아울러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서구 정신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헤브라이즘이 유대인의 전통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확산된 것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공인으로 카톨리시즘이 자리잡은 것과 공인 이후 성서를 발췌 편집하면서 여호수아 설화가 대폭 채택된 데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카톨리시즘이 형성되면서 교회는 세속화되고 필연적으로 성서는 도그마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론하는 것이 가장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저 이성주의 헬레니즘에 의해 도전받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앞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교접은 알렉산더 이후(BC 2~3세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근대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신뢰와 개인 존중은 근대에 성립된 것이 아니며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에 의한 동서 문화의 접변에 의해 이미 정신문화의 키워드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이전 희랍시대의 철학자들도 이 문제로 인해 심각한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세운 논리는 소피스트들이 전한 페르시아 정신문화에 맞서 희랍 정체성을 유지하고 도시국가 연합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고대 희랍사상은 개별자(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헬라 문화와 전체의 통합을 중시하는 페르시아 문화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것이고 헤브라이즘은 그 사이에 껴 수난을 당한 셈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정신문화는 보스포르스 해협(흑해와 지중해가 연결되는 해협)을 경계로 한 동서 지역간 대립과 투쟁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동로마의 수도 이스탄불(당시 지명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니케아(지금의 이즈니크)에서 열린 공의회의 삼위일체 논쟁은 동서 세계의 문화 통합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분열되어가는 로마를 통합시키기 위해 구심력의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의 수도를 이스탄불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는 동로마에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꾀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는 서구 정신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왜 삼위일체가 문제가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서구 정신문화의 핵심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