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감성지수) 높이기

버림받는 아이 - [자전거 타는 소년]

체거봐라 2011. 12. 20. 15:56

다르덴 형제 감독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니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아들]이 그랬는데 [자전거 타는 소년]도 그렇다.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불쾌한 게 아니고 싫은 게 아니고 불편했다. 영화를 보면서 불편해 하는 내가 불편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나는 왜 불편한가. 불편하다는 건 뭘 의미할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물음이 잠수부의 발목에 감기는 수초처럼 나를 숨막히게 한다. 이런 감정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비평가들은 참 어려운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유럽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에 탄복하기도 했다. 아! 우리는 참 저급하구나 하는 열등감도 발동했다. 어떻게 저들은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리 불안과 일탈적 자립추구에 대해 이런 저런 공부를 하고 있는 터라 이 영화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영화는 이행기 성장통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감동'을 보통 대리만족, 카타르시스로 이해들 하는데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은 그런 대리만족과는 거리가 멀다. 고통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이 되는 놀라운 힘을 가진 영화라고 본다. 그 고통과 불편함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곰곰히 새겨봐야 할 것 같다. 스토리만으로도 이 영화는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아들]은 자식을 살해한 청소년 살인범을 돌보는 어버지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부인이 이런 남편에게 '미쳤다'고 말하는 데에 공감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돌보다니. [자전거 타는 소년]은 아버지도 감당하기 힘든 난폭한 아이를 돌보기 위해 애인까지 버리는 착한 아줌마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말리는 아줌마에게 칼부림을 해가면서 제 멋대로 나가는 아이를 위해 어떻게 저렇게 헌신적일 수 있을까.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아들]에서 살인을 저지른 아이는 새엄마가 자신을 미워해서 바깥으로 나돌았다고 한다. [자전거 타는 소년]의 소년은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자신을 돌볼 형편이 안된다고 하니 강도짓을 해서라고 아버지를 도우려고 하지만 그 일로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아버지는 '너 때문에 감방에 가게 생겼다'며 외면해 버린다. 누구의 잘못인가. 낳아 놓고 돌보지 않는 부모의 잘못인가. 미성년자의 범행은 벌할 수 없는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그 아이들을 가슴에 안을 수 있을까.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을 해치는 잔혹한 아이에게 따스하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정의의 원칙과 용서하는 마음은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작 국산 영화 [오늘]은 나를 도덕적 진공 상태로 빠트려 버렸다. 사랑하는 약혼자를 죽인 살인자를 어렵게 어렵게 용서했는데, 그 일로 인해 내 인생 전체를 용서하는 마음에다 바쳤는데, 그 살인자가 또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살인 행적을 뒤좇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놈이 죽인 아이는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힘겹게 자랐지만 고생한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착한 아이였다. 이 착한 아이가 아버지를 자랑한다고 그걸 시기하여 죽여 버렸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대책없는 용서가 극악한 살인을 낳은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잘잘못을 가리려고 하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해서 해결될 일인가. 우리의 고통은 어디에 비롯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