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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 백석과 자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체거봐라 2017. 4. 12. 12:24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연줄이 직간접으로 백석 시인에게 연결되어 있는 게 참 묘하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가 백석 시집을 갖고 싶어 안달하다가 시집 전체를 필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윤동주는 백석의 시를 본받아 습작을 했다고 한다. 동주와의 인연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김소월과도 애틋한 인연이 있고 특히 <무소유>의 작가 법정 스님과 이어지는 인연은 우리들 스토리텔링(이야기)의 귀한 보배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이였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백석은 김소월 시인의 학교 후배였다. 오산학교 10년 후배 백석에게 소월 선배는 본받고 싶은 모델이었다. 백석이 쓴 에세이 <소월과 조선생>을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소월을 좋아했으며 오산학교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백석은 소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억 선생을 찾아갔는데 선생은 갖고 있던 소월의 습작 노트를 백석에게 건네준다. 백석은 소월의 습작 노트를 읽으며 너무 감동한 나머지 곧장 감상문을 써 신문에 투고했다 .


백석이 수필에서 언급한 '조선생'은 오산학교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다.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소월은 3.1 운동 주도자로 경찰에 끌려가 학대를 받고,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소월은 마음 둘 곳을 잃고 방황을 하게 되는데 조선생이 소월을 찾아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쏟으며 흐느꼈다. 백석은 소월의 노트에서 그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아팠을 것이다. 그 심정을 써서 투고를 했고 신문에 실리게 된다. 


1933년 일본 동경 청산(아오야마)학원 3학년 22세


백석이 소월을 본받아 시를 쓰고자 했듯이 동주는 백석을 닮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인연은 이렇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해방되던 해 동주는 일본 감옥에서 끔찍하게 죽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나면서 백석은 잊히어 갔지만 그 아름다운 인연이 그렇게 끊어질 수는 없었다. 87년 민주화운동으로 냉전 이데올로기가 좀 걷히면서 백석은 우리 문학사의 보배로 남쪽에서도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인연은 백석의 연인 '자야'를 통해 법정 스님에게까지 이어졌다. '자야' 이야기는 그의 작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전해지고 서울 성북동 [길상사]라는 절에는 ‘자야’의 백석 사랑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고 있다.


백석의 연인 ‘나타샤’의 원래 이름은 ‘김영한’이다. 한 눈에 남정네들을 사로잡는 기생이었다고 한다. 백석이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이 ‘자야’이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왔을 것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네의 절절한 노래이다. 백석과 자야와의 사이는 ‘자야오가’의 부부처럼 참으로 애처롭다. 백석은 멀리 도망가서 같이 살자고 ‘자야’에게 매달리는데 ‘자야’는 기생인 주제에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그녀가 얼마나 백석을 진심으로 위했는지는 그녀의 죽음이 말해준다. 백석이 자야를 얼마나 애타게 사랑했는지도 그의 사랑 노래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1936년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 25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앞길이 창창한 영재가 모든 영예를 다 버리고 ‘깊은 살골 마가리(오막살이)’에 들어가 살자며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고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차라리 두메산골 오막살이가 더 나을까. 1938년 즈음이면 아시아 전체에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때였으니 일제의 잔학한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리도 애타게 함께 가자고 매달렸건만 결국 ‘자야’를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헤어진 백석과 자야는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다. 나라가 둘로 갈라지면서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철벽이 들어서 버린 것이다. 백석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고 싶어 했던 살골 ‘마가리’는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새끼 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 전문 -


백석은 자야와 헤어지고 이곳저곳을 떠돌다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다시는 자야를 볼 수 없었다. 자야는 월남하여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 집을 열어 자리를 잡았고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재력가가 된다. 그래도 백석을 못 잊는 마음은 한결 같아서 백석의 생일날만 되면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화류계 기생이 순정이라니 이런 역설이 어디 있는가. ‘자야’는 죽을 때 전 재산을 미련 없이 내놓은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감동받고 평생 모은 재산을 전부 시주했다. 지금 가치로 1000억이 넘는다고 한다. ‘자야’가 기부한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난다. 법정 스님이 자야에게 지어준 법명 ‘길상화’로 절 이름을 지었다. 기생의 정조도 역설이지만 사내들 욕정을 희롱한 여인네가 해탈이라니…….


1980년대 중반 북한 가족 사진 70대 중반


백석은 말년에 북에서 농꾼으로 살다가 여든넷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죽고 3년 뒤에 자야가 죽었다. 자야는 죽을 때 백석이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녀의 유언대로 화장하고 남은 재는 길상사 뒤뜰에 뿌려졌다. 길상사 뒤뜰에 가면 자야의 사랑 노래가 들릴 것만 같다. 이렇게 소월에서 백석으로 동주로 법정으로 아름다운 인연은 이어졌고 우리에게까지 와 닿았다. 이런 게 전통이요 민족혼이 아닐까. 백석이 <모닥불>에서 노래한 것처럼 어르신도 개도 강아지도 화평하게 모닥불에 둘러앉는 게 곧 우리 공동체의 아름다운 문화가 아닌가. 손익을 계산하여 편을 가르고 거짓으로 속여 등쳐먹는 끔찍한 세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피억압의 아픈 역사와 분단의 질곡이 우리를 이토록 아름다운 전통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 모닥불이 되어 우리 가슴을 덥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