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 37주년이 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훌쩍 지났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5.18은 어떤 감동을 불러일으킬까요. 아마 별 감동 없이, 외워야 할 역사 지식에 불과하겠지요. 구지 그 아픈 기억을 들추어낼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할까요. 1980년에 전 중학생이었습니다. 제 고향이 광주에서 멀기도 했고 흔히 '중2병'이라고 하는 질병(?)을 앓고 있던 때라 광주의 비극을 인지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 끔찍한 일을 처음 봤습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때 이후로 매년 이맘 때가 되면 광주 망월동 묘지 참배를 갔습니다. 대학 1학년 때 학생회관 앞에서 열린 '광주 5.18 사진전'은 너무 끔찍했습니다.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젓가슴"은 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저의 역사 무의식을 확 뒤집어 놓았습니다. 나는 너무도 무지했고 가슴 없는 밥버러지였습니다.
80년 광주에서 그 끔찍한 일들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은 어땠을까요.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노라며 동지들과 어깨를 걸었다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이 겪었을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쓰라렸을까요. 심리적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그들을 비겁자라고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느라,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겠지요. 죄책감 때문에 오막살이 소박한 살림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안일(安逸)로 여겨졌을 겁니다. [오래된 정원]은 그렇게,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소박한 정원을 등지고 제 발로 사지(死地)를 찾아 나서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곱고 착한 ‘윤희’와 너무나도 행복하게 함께했던 아름다운 정원을 뒤로 하고 동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녀와 함께라면 두메산골 오막살이도 고대광실(高臺廣室) 부럽지 않을 ‘영원한 정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래된 정원] 눈물겹게 아름다운 둘만의 정원
‘현우’는 도시로 나가 금방 붙잡히고 무기수가 되어 젊음을 고스란히 어두운 감옥에다 매장하고 백발이 되었지만 아름다운 정원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윤희’만 생각하면 아직도 설레는 청춘입니다. ‘윤희’는 ‘현우’의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르며 가슴에 한(恨)이 맺히지만 ‘현우’의 눈빛을 그리워하며 그가 돌아올 아름다운 정원을 지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일까요. ‘윤희’는 불치병에 걸리고 그이와 함께 그토록 행복했던 그 아름다운 정원에서 젊은 생을 마감합니다. 출옥한 ‘현우’가 오래된 정원에 와서 ‘윤희’가 남긴 일기와 그림으로 삶의 공백을 메워 나가는 장면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끔찍한 상잔(相殘)의 도가니로 뛰어들게 했을까요. 진리를 좇는다고 곁에 있는 모든 걸 버린 뒤에야 비로소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부재(不在)가 존재(存在)를 일깨운다고 할까요. 사랑하는 내 님의 눈물, 그와 함께 깃들었던 보금자리만큼 소중하고 진실한 삶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래된 정원] ‘윤희’의 그림
소설 [오래된 정원]은 해외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입니다. 프랑스 문단에서 ‘위대한 소설’로 격찬을 받았으며, 『르몽드』 신문의 <2005 국내외 소설 7>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광주의 비극을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 세계인을 울리는 보편성을 획득해낼 수 있었을까요. 작가는 방북(1989년)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귀국(1993년) 후 바로 투옥되고 5년 옥살이 뒤에 석방(1999년)되면서 바로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10년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그가 목도한 냉전체제 종식이 이 작품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떠난 뒤에야 그리워지고, 잃고 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게 삶의 이치이듯이 눈물의 역사가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는구나 싶었습니다.
눈물로 부둥켜안을 때 진실한 관계가 맺어지고 그렇게 연인과 동지와 이웃이 얽혀 공동체가 이루지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려면 서로 마주보고 눈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래된 정원]에는 눈으로 말하고 눈빛에 매료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감하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수가 있겠지요. 진실한 관계는 이렇게 맺어지고 그렇게 맺어지는 관계로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웃과 함께 자연에 어울리면서 말이지요. [오래된 정원]이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천명하는 건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하지도 않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이념의 시대, 21세기초 개인화 시대를 넘어 앞으로 공감(共感)의 시대를 열어 가자는 고운 눈빛으로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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