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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氣槪)는 감성에서 나온다. - 만해 한용운의 겉과 속 -

체거봐라 2017. 6. 14. 11:20

3.1만세 운동이 일어날 때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요정 집에 모여 독립 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게 영 찜찜하다. 부끄러운 사실을 들춰내면 민족정기에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쩌랴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로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탑골 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했던 계획을 갑작스럽게 바꾸어 기생들과 놀아났던 요정 집에서 치루었다는 것도 그렇고 그 요정 집이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얻은 이완용의 별장이었다는 것도 영 마뜩찮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그 자리에 껴 얼마나 답답했을까.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 한 태화관


만해 한용운 선생은 시인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지만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분이다. 시인으로 절창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지식인, 민족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매국노로 변절했으니 한용운 선생이 그 자리에 동참했다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다. 민족 대표를 한 자리에 모시는 일을 주도했던 최린은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이고 그 자리에서 공포된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비겁하게 자기 이름은 빼 달라는 자가 선언서를 대표 집필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용운 선생은 차라리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 이런 의기 있는 분이 그 자리에 섞인 게 별로 달갑지 않다.



충남 홍성 한용운 생가


한용운은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관군으로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서자 심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아버지와 형은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가 죽고 그는 을미의병 항쟁 때 홍주에서 의병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고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한다. 아버지와 형은 일본군 편에서 농민군을 잡아 죽이는 짓을 하였으니 그가 얼마나 큰 번민에 휩싸였는지 짐작이 된다. 그의 이런 번민이 그를 불교 행자가 되게 만들었다.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수행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한다.



백담사 행자승 시절 만해 ⓒ불교방송 [만해 한용운]


아버지와 형이 손가락질을 받은 것처럼 그 또한 친일파로 오해를 산 적이 있다. 백담사에서 수행하던 중 책으로 접한 서구 문물이 궁금하여 세계 여행을 나섰는데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 첩자로 의심을 사 조선 청년들에게 치도곤을 당한 적이 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역설적이게도 그의 민족혼은 배신자라는 피의자 신세를 겪으며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아픈 경험이 만해를 불굴의 지사(志士)로 단련시켰을 것이다. 그는 고집스럽다 할 정도로 비타협적이고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했다.


만해의 불굴의 지조는 유명하다. 일본 통치 아래에서는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여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변절자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냉정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최남선이 길에서 만해를 보고 “오랜만이오 만해” 하면서 다정스레 손을 내밀었을 때 “당신이 누구요?”라며 모르는 척했고, “나를 몰라보느냐?”고 꾸짖듯이 따지자 육당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 당시 중추원 참의 고위직에 있었고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육당 최남선은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당신 누구요?”라고 건방지게 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가 영 마음에 안 들어 공약삼장을 쓸 때에는 본문과 완전히 다른 어조로 쓴 것을 보면 그의 의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을 한 민족 대표들은 일본 경찰에 자진 신고하여 모두 잡혀가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 안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33인 대표들을 극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소문에 민족 지도자라는 자들이 창피하게 대성통곡을 했다.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고 한용운 선생은 치받아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똥통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울어! 독립 만세를 부르고도 살아날 생각을 했단 말이냐? 나라 잃고 죽는 게 뭐가 슬프냐?” 죽음을 각오한 만해가 보기에 이들의 나약한 모습은 너무 한심했다. 출옥할 때 환영 나온 인사들에게 침을 뱉으며 욕을 하기도 했다.


윤동주                                         백석                                               한용운 


이런 분이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하는 연모의 시를 썼으니 이를 어찌 해야 하나. 사납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단호했던 그가 부른 이 노래를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서정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윤동주나 백석 같은 시인들은 노래도 너무 따스하고 용모도 너무 감성적이다. 그들에 비해 만해는 좀 무섭다 할 정도로 사납게 생겼다. 한용운의 시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이들 서정시인의 시에서 풍기는 감성과 영판 다르지 않을까. 김소월도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꼽힌다.  만해의 “님은 갔습니다”와 김소월의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 얼핏 보면 느낌이 비슷한데 한용운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이 두 시를 같은 느낌으로 공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