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굿모닝 인천] 게재 수필 - 귀촌친구(歸村親舊)

체거봐라 2017. 12. 6. 11:29


모닝커피 한 잔

 

귀촌친구(歸村親舊)

 

이한수 (인성여자고등학교)

 

잘 있는가? 몇 년 전에 얼마간의 농지를 얻어 푸성귀를 가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올해 농사는 어떤가? 그 일이라는 게 잘되어도 걱정, 못되어도 걱정이라던데. 가꾸어 영글게 하는 재미도 모르겠구먼. 세상 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동구 밖 개울에서 멱감던 거 기억나는가?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흔적도 없지만 그 시절 기억은 아직도 선하다네. 그 어린 시절이 참 좋았어.

지나고 보면 다 좋아 보인다지만 맑은 개울물에 멱 감으려면 차를 몰아 두세 시간을 달려야 하는 지금 살림이 그 시절보다 좋아진 것인지 정말 모르겠네.

 

한번은 그 개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네. 모처럼 아버지하고 개울에 나갔지. 내가 헤엄을 못 치는 것도 아닌데 물가에 아이를 두는 아버지의 마음이 영 불안했던 모양이야.

"어디 다른 데 가지 말고 이 자리를 꼭 지켜야 한다."

그렇게 단단히 다짐을 하셨지.

한식경이 지난 뒤에 내가 보이질 않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셨나봐. 아버지는 목청껏 나를 부르며 개울을 따라 내려오셨지.

얼마나 불안하셨을까. 그런데 나는 개울가에서 태연하게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던 거야. 나를 보자마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지.

"이놈아, 제자리를 지키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시는데 나는 영문을 모르겠는 거야.

"아버지, 저는 제자리에 있었어요."

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제자리를 지키려면 뭔가를 붙들든지 아니면 부지런히 헤엄을 쳐얄 거 아니냐."

 

우리가 살아가는 게 다 이와 같지 않은가. 제자리를 지키며 사는 게 정말 어려워.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나를 그냥 놔두질 않네. 다들 흐름을 타고 앞서가려고만 하니 혼자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는 낙오자가 될 것 같거든.

흐르는 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어라, 큰물을 거스르는 짓은 부질없다고들 하지만 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탄식하는 이들도 많지 않은가. 흐르는 세상에 떠밀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일이 수월치가 않네.

떠내려가지 않도록 기릴 만한 뜻을 꼭 붙들어야 하는데. 속류를 거스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여야 하는데.

 

여보게, 지난 날 자네가 세상일에 무심한 듯 말할 때 내가 어깃장을 놓은 거 기억하나? 나 하나 어느 기슭에라도 닿아 뿌리야 내리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큰물 진 뒤 시든 들풀처럼 한 생 잊힌다는 게 서운하지 않은가?

세상일이라는 게 참 모를 일이야. 자네는 그렇게 잊히고 싶었을 테지만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자네 말이 점점 또렷해지니 말일세. 지금 잊히는 것들이 나중에 기억되는 역리(逆理)가 아닌가.

자네가 땅에다 마음을 심는 뜻을 이제 좀 알 듯도 하이. 땀 흘려 낳은 건 땀 흘린 자의 것이라는 건 거역할 수 진리이지만 그 땀마저도 따지고 보면 땅에서 나왔다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깨달은 듯 하이. 땅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겉치레들에 우리 이젠 좀 무심해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지금은 소박해 보이지만 자네처럼 기슭마다 살림을 차리는 이가 많아지면 저 강()도 여울지고 굽이지지 않겠나. 그리 되면 온갖 생명이 깃들지 않겠나.

자네가 너무 그립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곧 길이 된다’ - 루쉰(魯迅)

큰물에 나가 놀고 싶은 욕심을 다잡기가 참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하멜른의 피리 소리에 현혹될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욕심이라는 게 참······. 억지로 큰물을 짓다가 낭패 당하는 걸 보면서 다시 되새긴다. 얕은 강기슭, 개펄이 소중한 생명 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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