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인식을 규정하느냐, 아니면 인식이 존재를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철학적 담론(談論)은 이 물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무척 어렵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어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는 말을 섞기는커녕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철학적 고민은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서도 가능합니다. 너무 어려운 말을 써서 어렵다고 오해하게 된 것이지 원래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를 풀어 보는 건 어떨까요. 요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잘한다고 칭찬하고 부추기면 실제로 잘하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이런 말을 들으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사람이라서 착하다고 칭찬을 받는 것인지, 착하다는 칭찬을 자주 받아 정말 착해지는 것인지 아리송해지거든요. 원래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 그렇게 봐 버릇하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존재가 인식을 규정하느냐, 인식이 존재를 규정하느냐’ 라고 말합니다. 철학 용어가 어려운 것이지 우리는 늘 이런 철학적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철학의 양대 산맥인데 굳이 나눌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 대상의 실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귀결되니 인식론이든 존재론이든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시각(視覺)이 문화 통념에 의해 지배받는다면 우린 대상의 본질(本質)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現象)만 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우린 대상의 본질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지요? 철학 존재론이 밝혀내려고 하는 게 바로 이 본질입니다. 겉모양, 즉 형상(形象)을 벗어나 그 너머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탐구하니 존재론을 달리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도 부르게 된 겁니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나오니 너무 어려운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여러분은 이미 형이상학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처음 만날 때에는 겉모습에 호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자꾸 만나다 보니 속을 잘 모르겠고, 계속 만나도 될까?’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속이 곧 본질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을까요? 이걸 알면 오해하거나 속지 않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니 철학 공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마다 그 상황을 달리 보는 이유가 뭘까요? 보는 시각이 달라 다르게 보는 점에 대해 탐구하는 게 인식론이라면 대상의 겉모습(현상) 속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탐구하는 게 존재론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보게 된 건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 정신 세계의 작동 원리 즉 본질을 알아야 겉 행동 너머의 속 마음을 알 수 있겠지요.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의 정신의 본질이 컴퓨터의 데이터 처리와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뇌 신경이 컴퓨터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유통시킨다는 가설을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SNS에 늘 연결되어 있으며 실시간 정보를 핸드폰을 통해 유통시키고 있지 않나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중 몇 시간 동안 핸드폰을 사용하는지 체크해 보면 내 일상 중 대부분의 시간이 SNS에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매트릭스]는 장 보드리야르의 대표작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작품 앞 부분에 노출시키면서 영화가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보드리야르는 20세기 대표적 철학자인데 플라톤의 현상과 본질 이원론(二元論)을 부정합니다. 보기에 따라 다양하게 보일 수 있지만 본질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본질을 밝혀내려고 하는 철학 존재론을 형이상학이라고 하는데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본질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원본 없는 재현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형상(形象) 뒤에 감춰진 본질이란 건 따로 없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시뮬라크르(복제)만을 생산 유통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영화의 제목 ‘매트릭스’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태아가 자라는 자궁(子宮)을 의미하기도 하고 수학의 행렬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로 영화에서 인공지능이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인간을 태반과 같은 항아리에 담아 육성시키니 그런 기능을 가진 컴퓨터 본체를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게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2진수 행렬로 전산(電算) 데이터를 처리하니 AI가 구축한 가상세계는 본질적으로 행렬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요. 인간이 시각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나 후각으로 인지하는 냄새 등 모든 감각은 뇌세포에서 분비하는 호르몬 물질의 조합으로 정보화된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 호르몬 물질 조합이 컴퓨터 데이터 처리 단위인 2진수 행렬과 상호 교신이 된다면 인간의 정신 활동은 컴퓨터에 의해 정보 처리될 수 있으니 컴퓨터와 인간의 뇌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에 의해 양육되면서 뇌신경이 컴퓨터 회로에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너무 끔찍한데 우리는 이미 컴퓨터 통신망에 연결되어 일상의 대부분이 네트워크에 의해 정보 수집되어 처리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휴대폰 네트워크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휴대폰 메뉴 중 ‘설정 -> 디지털 웰빙 및 자녀 보로 기능’을 활용하면 매일 몇 시간 정도 핸드폰을 사용하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취침 시간을 빼면 하루 중 절반 정도를 시간을 핸드폰 사용에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가 무엇인지 가르치면서 말합니다. “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해. 인간은 매드릭스라는 신경 상호작용 시뮬레이션의 일부로 연결되어 있어.” 이런 모피어스의 말을 부인할 수 없다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전자 신호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 영화는 AI가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하고 인공지능은 인간을 플랜트 재배하면서 에너지를 뽑아 쓰게 된다고 예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워지기 위해 연마하는 인격의 본질이 주입된 전자 신호에 불과하다면 결국 우리는 많은 정보에 접근할수록 노예로 전락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양계장 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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