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의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후반전이 한 십분 정도밖에 안 남았다. 점수는 뒤지고 있지만 아직 승부가 결정 난 건 아니다. 감독은 벤치에 앉아 있긴 하지만 표정이 심각하다. 우리 팀이 질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코치는 사이드라인을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분주하다. 나는 땀이 범벅이 되었지만 크게 힘든 줄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눈을 부릅뜨고 경기에 몰입해 있지만 속으로는 희죽거리고 있다. 코치가 낌새를 챘는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야, 센타, 레프트 레프트.”
‘아하!’
그제서야 눈치를 챈 건가? 내가 좀 딴 데 신경이 가 있었구나! 나는 얼른 패스한다. 슛, 아깝다. 또 노골(no goal)이다. 공수전환, 시선이 또 오른쪽 사이드라인 관중석 세 번 째 줄 ‘지민’이한테로 간다. ‘지민’이는 두 팔을 들어 올려 외치고 있다.
“권창수, 잘 한다. 권창수, 잘 한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히죽 웃기까지 한다. ‘경기 중에 이게 뭔 짓이람? 코치가 눈치 채지나 않았을까?’
스코어 32대 29로 우리가 졌다. 다들 지치기도 했지만 표정들이 무겁다. 이럴 때 분위를 잘 타야 한다. 나도 짐짓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코트를 나왔다. 감독 주변으로 둘러서서 다들 침통하다. 관중석에서는 아직도 응원이 계속되고 있다.
“힘내라. 힘내라. 우리 제고 힘내라.”
관중석 응원 소리에 ‘지민’이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게 느껴진다.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야, 권창수, 잘 한다 잘 해.”
‘지민’이가 한 말 “잘 한다”와 감독이 한 말 “잘 한다”가 소리는 같지만 의미가 다르다는 건 너무 뻔하지요. 그 말이 나온 정황과 말한 사람의 억양을 감안하면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으로서 유효한 의사소통 수단인 게 맞습니다. 그런데 미묘한 감정을 전할 때에는 말이란 게 참 쓸모가 없다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소쉬르는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언어 랑그(Langue)와 사적(私的)이고 애매한 언어 파롤(Parole)을 구분했고, 기호를 기표(記表, 시니피에)와 기의(記意, 시니피앙)의 결합체계로 설명했습니다.
의사 소통은 가능한가? 비트겐슈타인 아이디어
우리는 보통 상대방과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될 경우 흔히 그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말이란 게 마음을 전하는 도구로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면 오해가 풀리는 경우도 많고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도 많이 줄어듭니다. 말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말이 소통의 도구로 믿을만한가 의심이 생깁니다. 그래도 말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 말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어철학은 우리에게 ‘말은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언어의 철학적 의미를 이야기 할 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극 지방의 에스키모인들은 눈(雪)을 지시하는 단어가 열 여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말에는 한 서너 가지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얼핏 기억나는 것만 예로 들어보면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이 설원(雪原)을 지나가며 눈구덩이(크레바스)에 빠질 가능성은 이방인들보다는 훨씬 적을 겁니다. 이방인들의 눈에는 똑같이 보이는 눈밭이 그들에게는 작은 차이라도 구분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쌓인 눈의 미세한 차이를 담아낼 수 있는 언어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겁니다.
언어는 뜻을 전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상식적인 생각인데 에스키모인 얘기를 들으면 이런 상식적인 생각을 의심하게 됩니다. 어떤 언어체계를 습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사물에 대한 이해 방식을 결정한다고 봐야 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체계가 눈(雪)의 섬세한 차이를 분간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양인이 꿈에서 용(龍)을 보면 길몽이라고 하고 서구인이 그러면 흉몽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용'이라는 언어표상(발음 또는 문자)과 대응되는 개념(의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예들을 보면 습득한 언어체계가 사물에 대한 이해 방식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언어는 사고를 지배합니다. 언어가 주동적이며 우리 생각은 언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체계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회화 과정을 밟으며 특정의 문화를 습득하게 되고 특정의 언어체계를 익히게 됩니다. 특정의 언어체계와 문화패턴은 특정의 사고방식과 이해방식을 결정지웁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물을 자유롭게 보지 못하고 이미 결정된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며 주체적으로 사물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어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고 의사소통이 꼬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로써도 언어는 너무 부실합니다. 정확한 전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젠 상식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말하려고 할수록 오해는 커지고 말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깊은 심연(深淵)을 건널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을 예로 들어 봅시다.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머리속으로 다른 그림들을 그릴 겁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입니다. 그래서 밥보다 노래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언어가 실로 무용지물이 되기 쉽습니다. 밥보다 노래가 중요한 사람이 보다 추상적인 말들을 많이 사용하니 그렇습니다. ‘쌀 한 가마니’라는 말보다 ‘사랑하는 만큼’이라는 말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생리적 욕구보다 문화적 욕구에 의해 지배받을 가능성이 커지니 말도 어려워지고 언어의 한계를 더 많이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얘기해서 언어에 대해 철학적 의문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체계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고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그만그만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고 구령에 맞춰 똑같이 걷는 병정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언어가 , 나의 삶이 너무 레디메이드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복잡한 미로로 빠져들고 마니 말입니다. 내가 그려놓은 '사랑'에 대해 의심하면 소통은 불가능해지고 심각한 외로움에 빠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이 진실하든 허구이든 게임에 뛰어들어 몰두하는 것이 상책일지도 모릅니다.
언어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은 획기적인 명제를 제시합니다. “언어가 인식을 지배한다.” “언어는 의사를 소통시킬 수 없다.” 두 명제는 상식을 뒤집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그림(畵)처럼 세계(事物)을 그린다고 합니다. 명제는 언어그림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회화에서 점․선․면․색채가 조화를 이루어 사물을 그려내듯 명제들이 조화를 이루어 세계를 그려냅니다. 잘 그린 그림은 사물을 잘 반영한 것이듯 조화로운 언어그림도 세계를 잘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니 위의 두 명제가 세계를 잘 반영한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들 명제들은 서로 그물망처럼 조화롭게 직조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명제를 결합시키면 “의사를 소통시킬 수 없는 언어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가 됩니다. 의사를 소통시킬 수 없는 언어가 어떻게 우리의 인식을 지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명제는 언어가 세계와 자아, 또는 자아와 타자를 소통시키지 않고 분리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당신과 나를 이간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소통의 구조>
우리는 보통 말로 세상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언어관은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객관세계는 실체로 존체하고 관념세계는 이 객관세계를 모사한 것이며 언어는 모사하기 위한 재료 즉 비트겐슈타인이 쓴 용어로 언어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비교적 간명하며 실체적 존재인 객관세계를 진리의 준거로 삼을 수 있으니 상대주의의 혼란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가서 확인해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언어체계를 습득하며 객관(세계)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관에 의하면 말이 얼마나 정확한가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말이 얼마나 객관 실체를 잘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관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을 말로 드러내는 변증법적 행위를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한 듯합니다.
내가 당신을 포착하여 말로 담으면 당신은 이미 저만치 가버리고 마니 말의 그물은 항상 비어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언어로는 아무 것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객관적 실체와 언어화한 개념이 일치하는가 하는 것도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말이 내 마음을 딱 맞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험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말이 오해를 낳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어화(개념화)하면 실체를 왜곡 변형시킨다는 걸 어린 아이들도 잘 압니다. 그러니 언어가 대상을 반영하여 객관 사실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건 너무 순진 생각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상식적인 차원의 언어 이해가 우리 삶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만남을 희구합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참다운 경험을 위해,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언어에 대한 보다 유용한 관점을 개척하기 위해 ‘경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소통도구로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인식)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헤겔은 “경험을 수행하는 의식이 경험작용의 방향을 대상 쪽에서 그 자신 쪽으로 돌린다”고 간파했습니다. 헤겔의 생각에 의하면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경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경험이 있을 수 있을까요? 발견의 놀라움은 경험태가 선험태와 일치할 때 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루어 짐작하지 않으면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발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모두 죽은 것임에 분명합니다. 박남수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매양 쏘아 맞추는 것은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은 생각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소통 수단입니다. 표정과 몸짓도 감정을 전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는데 관념(觀念)을 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라는 게 화근일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말조심 하라는 경구가 참 많습니다. ‘혀 아래 도끼 있다’는 끔찍한 경구는 그 한 예입니다. 사자성어 구시화문(口是禍門)은 ‘입이 재앙의 문’이라고 경고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知者不言 言者不知(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모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같은 경전의 유명한 구절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라고 하면 도에서 멀어지고 이름 붙이면 어긋나 버린다)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말이 생각을 뒤틀리게 한다니 이런 역설이 어디 있습니다. 말로 이치를 궁리하지 않고 어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이 씨앗이 된 다툼
‘대학살의 신’은 말이 화근임을 아주 실감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연극 공연으로 너무 유명한 작품인데 근래 영화로 만들어져 누구나 쉽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목에 학살(虐殺, Carnage)이라는 끔찍한 말이 들어가서 무슨 폭력물이거나 공포물로 짐작하겠지만 원래 연극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액션 신은 전혀 없습니다. 작품의 배경 스케일도 너무 협소합니다. 공간 배경은 현관 앞과 거실, 화장실이 전부입니다. 이런 단순한 배경으로 이런 끔찍한 드라마를 구성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랍습니다. 작품의 주제도 단순합니다. ‘혀 밑에 도끼 있다’는 흔히 듣는 속담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너무 뻔한 주제에 비좁은 공간에서 거의 한 시간 반 동안 벌어지는 말싸움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완성도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이 작품은 말이 얼마나 끔직한 학살(?) 수단이 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양 있는 두 부부가 애들 싸움 때문에 만나서 어른답게 수습을 하려고 합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는 건 못 배우고 상스러운 어른들이나 하는 짓이란 걸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교양과 상식이 나중에 이들을 사나운 맹수가 되기 만듭니다. 내 자식을 상처받게 한 옆 집 애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는 아주 점잖게 우아하게 교양을 떨지만 그 위선이 너무 가증스러워 자꾸만 속으로 감춘 발톱의 날이 서게 됩니다. 일은 자꾸 꼬이고 말은 거칠어져서 급기야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적나라하게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냅니다. 애들 키우며 다반사로 겪는 일을 갖고 무슨 ‘학살’이라는 끔찍한 말까지 쓰냐고 떨떠름해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우린 이렇게 쉽게 끔찍해지는 게 맞지 않습니까. 가식과 위선의 장막이 찢어지면 실로 맹수로 표변해서 죽이려고 드는 게 가련한 우리 인간이지 않습니까.
가해자 아이의 부모가 피해자 아이 부모 집을 방문하여 사과를 하고 두 아이가 화해를 하도록 잘 유도해 보자고 상의를 하며 피해자 아이 부모의 요청으로 사실 확인을 위한 문서를 작성하다가 갈등이 시작됩니다. 피해자 아이 엄마가 “막대기로 무장(armed)을 하고 얼굴을 때렸다.”라고 서술하는데 가해자 아이 아빠가 이의를 제기하여 ‘무장하다’를 ‘들다(carrying)’로 바꾼다. ‘무장’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 겁니다. 피해자 아이 엄마는 직업이 작가이고 가해자 아이 아빠의 직업은 법무사입니다. ‘무장’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인간의 위선을 꼬집는 작품으로 흔히 읽히지만 우리 언어가 소통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언어철학적 문제를 제기한 작품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 참고 ■
강성찬 단편영화 <언어 게임>
지식채널e <랑그와 빠롤>
영화 [비트겐슈타인] (1993)
영화 [컨텍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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