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토록 믿어왔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속이면 어떨까요. 배신감 때문에 잠을 못 이룰 만큼 마음에 상처를 받겠지요.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그 인간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는가’ 거듭거듭 되물으면서 그를 탓하겠지요. 그런데 이게 다 저 때문이랍니다. 그의 행동이 왜 잘못된 건지, 그의 행동이 그 사람 본심에서 나온 건지, 그의 행동을 내가 사실대로 인지한 건지, 그의 행동을 나는 왜 나쁘게 보는 건지, 이 많은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있는지 자문(自問)해 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오해한 건 아닌가, 내가 왜 이렇게 삐딱해졌지’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시각(視覺)과 인식(認識)에 대해서 되짚어보고 살펴보는 게 철학 인식론입니다. 인식론에다 증명할 수 있는 실증적 방법론을 보태면 그게 심리학입니다. ‘철학, 심리학’ 하면 보통 사람은 좀체 다가갈 수 없는 무슨 대단한 학문이라 생각들 하는데 늘 ‘내가 왜 이래’ 고민하는 여러분들은 이미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심리학에 관심이 엄청 많지요. 영화나 소설을 감상하면서 이 철학적 사유를 이어나가 보도록 합시다.
어려운 개념만 잔뜩 늘어놓으면 너무 골치 아프고 지루해서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플라톤을 철학의 아버지라고들 그러는데 ‘이데아’니 뭐니 어려운 개념부터 나오면 아버지는커녕 외계인처럼 멀게 느껴지는데, 스토리와 이미지로 감상하면서 느낌이 오면 철학은 정말 삼시세끼처럼 가깝고 꼭 필요한 것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이 인간의 인식을 동굴 그림자에 비유한 건 참 아버지다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굴 비유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물을 인지할 때 그 사물 자체를 보는 게 아니고 굴절된 빛에 의해 비춰진 동굴 벽의 그림자를 보고 그 사물을 봤다고 착각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 눈으로 직접 봤다니까’ 하면서 내 감각을 존재의 근거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재미있는 예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늘 접하는 형광등은 교류 전류의 방전 효과를 이용한 조명 기구입니다. 교류는 직류와 달리 음극과 양극이 빠른 속도로 바뀌는 전류라서 교류 전원을 쓰는 형광등은 빠른 속도로 반짝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눈은 형광등이 반짝인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파리는 형광등을 반짝인다고 느낀답니다. 그러니 형광등을 인지(認知)할 때에 인간은 파리만도 못한 거지요. 결론적으로 인간의 사물 인식은 감각기관의 감각 능력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곧, 내가 본 게 다가 아니라는 얘기이지요.
인간의 인지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상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다면 옳고 그름과 선악(善惡)에 대한 인간의 판단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근본적으로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습니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자극에 대한 반응 패턴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 방법론이 심리학에 적용되어 행동심리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습니다. 심리학자 ‘스키너’는 인간의 심리는 자극 반응 패턴에 불과하며 시스템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면서 인격(人格)이라는 것이 도덕적 품격의 높낮이로 평가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성은 다만 체제와 시스템에 의해 길들여진 행동 패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늘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주입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정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영화 [트루먼 쇼]는 조종당하는 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는 영화로 철학 인식론에 대해 얘기를 풀어나갈 때 자주 언급되는 명작입니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어려운 인식론에 심취하게 된다는 게 참으로 놀랍습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인식론을 이해하는 데 참으로 적절하고 간략한 설명이기는 한데 가슴을 울리면서 깊은 사유(思惟)에 빠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영화 [트루먼 쇼]는 인간 인식의 혼란을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불가분(不可分)과 혼선에 빗대고 있는데 이 비유가 참 오묘합니다. 우리는 보통 원관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보조관념에 빗대는데 여러분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요. ‘영희는 정말 천사 같아.’라고 자꾸 들으면 영희는 천사같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원관념 ‘영희’와 보조관념 ‘천사’ 중에서 어느 것이 본원(本原)인지 불분명하게 되지요.
수천 개의 카메라가 주인공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하여 전세계로 방송한 [트루먼 쇼] 프로그램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트루먼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하여 30여 년 성장의 과정이 몰래카메라에 의해 낱낱이 촬영되고 전세계로 방송됩니다. 트루먼의 가족과 직장 동료, 심지어 연인까지도 트루먼을 속이는 연기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화 속 ‘트루먼’과 얼마나 다른가요. 우리의 일상도 일거수일투족이 촬영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행동이 기록되고 평가되면서 우리는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트루먼’은 결국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역할극에서 탈출하려고 합니다. 영화 세트장을 나가려고 할 때 조종자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들리고 ‘트루먼’은 묻습니다. “당신 누구시오?”
“난 수백만 명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난 누구죠? 전부 가짜였군요.”
“자넨 진짜야. 이 세상에는 진실이 없지만 내가 만든 그곳은 다르지. 이 세상은 거짓말과 속임수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 게 없어. 난 누구보다 자넬 잘 알아. 자네는 지금 두려워서 떠날 수 없는 거지? 괜찮아. 다 이해해. 난 자네 인생을 지켜봤어. 자네가 태어나는 것도, 첫걸음마를 떼는 것도, 입학하는 것도 지켜봤지. 자넨 떠나지 못해. 자넨 여기 내 세상에 속해 있어.”
‘크리스토프’의 설득에서 굴하지 않고 ‘트루먼’은 세트장 문을 열고 나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우리는 모두 세트장 안에서 짜여진 각본대로 역할극을 하고있는 게 아닌가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내 역할을 벗어던진다는 건 곧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일 텐데 그럴 수가 있을까요.
감시와 감옥에 대해 연구한 철학자로는 미셸 푸코가 유명한데 그는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현대 사회를 "감금 사회"로 표현했습니다. 근대 초창기 ‘제러미 벤덤’이 구상한 감옥 ‘판옵티콘’은 소수의 감시자가 다수의 죄수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공간 구조였지만 현대 사회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활동하여 인간의 모든 행동을 상시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 현대인은 모두 죄수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트루먼 쑈]는 그냥 판타지 영화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을 가장 리얼하게 그려낸 작품이 아닐까요. 현대인의 삶은 허구와 실재의 구분이 애매할 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스스로 주체임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프로그래밍된 로봇에 불과하다는 걸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요. 참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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