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밥 먹으러 학교 왔지?

체거봐라 2008. 5. 24. 10:22
밥 먹으러 학교 왔지?

인성여고 이한수 hansu85@hanmail.net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여름방학이 벌써 끝났습니다. 방학이 끝날 쯤 되면 학교가 그립고 학생들이 보고싶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 교직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우리 아이는 방학이 끝날 날을 기다립니다. 제가 중학교에 근무할 때에는 방학이 너무 길게 느껴졌더랬습니다. 제가 너무 나이가 들어선지 인문계 고등학교가 재미없어서선지 아리송합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듯이 인문계 고등학교는 전쟁터입니다. 빨리 학교 가고 싶다는 우리집 아이도 중학생이 되면  학교 가기 싫다고 투정할 게 뻔합니다. 고등학생이 되면 병영의 군인처럼 엄살을 떨지도 못할 지경이 될 겁니다. 고등학교는 전쟁터이니까요. 그냥 이렇게만 얘기해도 대부분의 독자분께서는 공감을 하실 겁니다. 웅변을 하지 않아도, 이런 저런 통계를 제시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정말 숨막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도 밥때가 되면 다들 들뜹니다. 훈령병 시절, 주걱으로 얻어맞으면서도 밥먹는 게 제일 행복했던 저의 옛추억처럼  말입니다. 4교시가 마칠 시각이 다가오면 졸던 아이들 눈에 생기가 돕니다. 종이 울리면 식당으로 내닫는 진풍경이 매일 반복됩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마음이 좀 무거워집니다. 강의가 지겨워 몸을 뒤틀던 아이들이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눈빛마저 빛내면 우스게 소리로 "너희들 밥먹으러 학교 오지?"하고 짓굳게 놀립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밥 먹는 일보다 귀한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싶기도 합니다. '쌀 한 톨에 세상 이치가 다 담겨 있다'는 해월 선생의 말씀이 생각나고, 숭늉으로 그릇을 부시는 절간 공양 풍습도 생각납니다. 학교에서 밥 먹는 일을 담당하게 되면서 부쩍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키우는 것보다 쌀 한 톨을 귀하게 대하는 습관을 들이는 일이 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 봅니다. 나이가 마흔이 되었는데 이제 철이 든다 싶으니 말입니다. 

  8월 20일자 인천일보에 영양사 한 분의 양심고백 글이 실렸습니다. 온갖 비리로 얼룩져 있는 학교 급식 일에 몸담은 자신이 치욕스럽다며 아프게 쓴 글이었습니다. 밥 먹는 일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바쁜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의 식사가 위태롭습니다. 우리 교육이 거꾸로 서있는 것을 학생 식당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식재료 제공업체로부터 돈을 받는 사람들을 탓하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남보다 더 앞서가기 위해 효율을 숭상하고 경쟁력을 키우려는 자는 쌀 한 톨을 소중하게 여길 까닭이 없겠지요. 쌀알을 여물게 하는 자연의 신비와 낱알을 거두는 농부의 수고로움에 고개를 숙이는 자는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이런 사람과 더불어 살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우린 왜 우리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마련하는 수고로움을 체험케 하기보다 빨리 먹어치우고 책상머리에 앉으라고 호통을 치게 되었을까요. 삶의 참다운 이치는 책보다 밥에서 나오는데 말입니다. 남보다 먼저 먹으려고 뛰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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