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씨네마

박제화된 청춘, 미국 젊은이의 사회 진출 - 어드벤처 랜드

체거봐라 2009. 10. 25. 22:41

젊은 때에는 지금 현재 여기가 영 답답하고 어떻게든 멀리 떠나고픈 열망이 가득한 게 당연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은 줄어들지요. 생명체가 성장하여 짝짓기를 할 무렵에는 원기 왕성해야 하고 자신과 이질적인 개체에 호감을 갖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유리합니다. 바로 이 시기가 청춘기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심장의 박동이 강하고 빠르니 항상 자신만만하고 도전적인 때입니다. 뭔가 새롭고 다른 걸 추구하게 됩니다. 물리학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가장 느리게 가는 때이도 합니다. 청춘기에 일생중 시간이 가장 느리게 흐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춘기에는 주변의 만물이 너무 느려터져 보이고 뭔가 일이 생기지 않으면 답답해 못 견디는 게 정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주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자들은 이런 생체 리듬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해석합니다. 생명체의 신체가 클수록 세포의 에너지 생산에 여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신체가 클수록 심장 박동수가 느린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신장이 2배 크면 체적(부피)은 8배 큽니다. 한 변의 길이가 2배 길어지면 가로 세로 높이가 각 2배 길어지니 부피는 8배가 커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신체가 큰 동물이나 작은 동물이나 세포 하나의 크기는 같습니다. 그러니 신장이 2배 큰 동물은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세포마다 약 1/4배 적은 에너지만 생산을 하면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 심장이 천천히 뛰어도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게 처음에는 신체가 커지는 겁니다. 신체가 다 커지고 나면 그 관성에 의해 에너지 대사량이 점점 줄어들고 그에 비례해 운동량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생체시계가 점점 느려지는 것입니다. 생체시계가 느려지면 외부의 시간은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20대에는 시간이 20속도로 흐르고 40대가 되면 시간이 40속도로 흐른다는 게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춘기는 신체가 다 자라고 에너지가 가장 많이 남아도는 시기입니다. 늘 자신만만한 게 바로 이런 생리학적 특성 때문입니다. 생체시계는 이때를 고비로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주변의 모든 사물이 나보다 느려 답답했었는데 청춘기에 역전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때부터 내가 좀 느려지고 외부 시간은 좀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대체로 이때 짝짓기를 하게 되는데 생체시계 속도가 최고점에 도달하는 무렵이라 미래지향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우자 선택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이런 원리는 진화에도 유리합니다. 근친교배를 본능적으로 꺼리고 훼손된 유전자의 회복을 위해 보다 이질적인 유전 형질을 소유한 개체와 짝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청춘기의 특질을 이런 생물학과 수학, 진화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우리는 청춘기를 분석하기보다 상상하는 데 익숙합니다. 상상의 산물이 바로 문학이고 문학은 대부분 청춘기의 혼란과 충격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청춘기를 객관화 하기보다 형상화(상상) 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수학으로 분석하는 게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지극히 낭만적인 상상에 의해 표상된 이미지들로 가득한 게 바로 청춘물이라는 것입니다. 청춘을 분석하고 객관화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생물체 특히 동물의 신체 크기와 심박수의 관계에 대한 수학적 접근은 '청춘'이라는 지극히 비유적인 이미지에 갇힌 청춘기를 분석적으로 보게 만드는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이제 우리 교육자들은 이런 접근법이 시사하는 것처럼 청춘기를 분석하고 객관화하여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대 젊은이들에게 청춘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으며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 [어드벤처 랜드]는 이런 청춘기의,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청춘을 전혀 모험적이지 않은 모험담(?)으로 말해 줍니다. 박제화된 모험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놀이공원을 청춘기를 빗대는 비유어로 사용하는 발상부터 만만치 않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청춘들이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벌어지는 해프닝이 그냥 웃고넘기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알레고리를 품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진짜 모험을 거세당한 청춘들의 가짜 모험이 문명사적 종말을 암시하는 것 같아 암울해질 수도 있는 청춘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청춘기는 어드벤처(모험)으로 상상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 생물학, 물리학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물질 문명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러고 있는 것입니다.

 

7,80년대에는 개발독재의 권위주의가 청춘의 낭만을 짓누르는 중심 변수였습니다. 지금은 좀더 근본적인 모순에 맞닥뜨린 것으로 보입니다.

<계속>